적극적인 이민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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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60년대에 월남파병을 놓고 찬반양론을 한참 벌이던 일이 생각난다. 결말은 정부와 재야 찬성론자들의 주장대로 찬성쪽으로 났다.
그 때 파병 찬성론자들의 일부는 한국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후 최초로 기특 될 해외출병이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옹색한 한반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사고의 스케일을 넓은 바깥세계를 향해 크게 고양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논리를 펐다.
그들은 월남파병을 「해외웅비」의 제기로 잡을 수 있다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파병에는 용역진출이 따랐고, 「월남특수」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경제성장에 결정적이라고 할만한 기여를 했다.
한국의 기업들은 월남에서의「재미」와 「수업시대」를 거쳐 마침내는 중간진출로 눈을 들렸고, 태평양 저쪽의 넓은 세계, 아프리카·유럽·중남미에서 드디어는 『여기 한국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었다. 한국은 완전히 「세계속의 한국」이 된 것이다.
이렇게 월남파병으로 시작된 우리의 해외진출 이전에는 일제하에서 징용과 군인으로 끌려간 것이 계기가 된 60만 재일동포, 하와이·멕시코·쿠바의 사탕수수밭에 팔려간 이민들. 그리고 60년대 초반에 시작된 남미이민들이 재외한국인 또는 한국계의 전부였다.
건국이래 제4공화국까지 정부는 국민들의 해외여행을 숨막히게 통제하는 편이었고, 남미이민이라는 것도 주먹구구식으로 그저 내보내는 정도로만 그쳐, 가령 파라과이로 이민간 사람들이 대거 브라질로 불법 입국하는 등의 실패를 거듭하여 77년5월에는 일단 이민중지의 조치가 취해졌다.
반면에 70년대의 10년 동안 재미 한국인의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나 지금은 통산 60만으로 통할만큼 되었다.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간 동포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상류층 사람들이 포함되어 한때 저명인사들의 도피성 이민이라는 해괴한 시비까지 일어났다.
「약대와 바늘구멍」비유가 생각 날 만큼 어렵고 복잡한 수속을 거쳐 나간 이민들중에 지참금 한도액 2만 달러(4인 가족 기준)의 규정을 지킨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A씨는 도착즉시 모텔을 사고, B씨는 빌딩을 사고, C씨는 고급주택부터 샀다는 따위의 화제가 로스앤젤레스·뉴욕 등지의 한인사회에서 만발한 것은 2만 달러 한도액이 지켜지지 않는 사문서임을 증밍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부가 80년대에 들어서서 ①남미이민재개 ②정착금 한도액 10만 달러 ③자유화에 가까운 해외여행 규제의 완화는 지금까지의 근연안적 사고와 이민정책부재의 탈피라는 의미에서 크게 환영할만한 조치다.
정착금 10만 달러가 관연 현실에 맞는 액수인지는 이민 대상국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국내은행의 해외지점들이 교포들에게 할 수 있는 사업자금 융자를 5만 달러에서 10만 달러로 늘려주는 것으로써 실질적인 정도지수이 되리라고 본다.
이민길에 오르는 동포들에 대한 본국의 지원이 성의가 있고, 그래서 이민지에서의 정착이 빠르고 착실하면 우리동포들에 대한 이민을 받는 나라의대우도 월등히 개선될 것은 쉽사리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일일이 숫자를 들것도 없이 서울은 만원이요, 한국은 만원이다. 분단의 현실이 요구하는 우리의 대외관계의 확대·개선, 수출의존의 경제, 그리고 철저히 폐쇄된 북괴와 대조되는 개방사회로서의 한국의 체통을 위해서도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정부의 결정은 현명한 것이다.
한동안 말썽 많던 해외동포들의 반한·반정부적인 자세도 그 동안의 규제일변도의 정책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교훈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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