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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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침울한 실내에 앉아있노라니 문득 화사한 5월의 햇살이나를 밖으로 유혹한다.
수업이 빈 시간이면 나는 아직도 냉기 서린 건물을 벗어나 학교 뒷산언덕에 오른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 긴 머리칼 사이로 비쳐 덜고 살랑거리는 바람 속에 푸른 잔디 잎은 흔들거린다. 맑은 햇살, 맑은 공기, 싱그러운 푸르름, 그것이 좋아 나는 풀밭 위로 벌렁 눕고 싶은 충동마저 느낀다.
그럴 때면 풀숲 속에서 무심히 눈에 띄는 것이 오랑캐꽃이다. 제비꽃 혹은 반지꽃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약한 줄기에 질은 보라빛 작은 꽃이 피는 들꽃이다.
꿈 많은 소녀시절, 봄이면 나는 이 꽃을 찾아 들길을 헤맸다. 오랑캐꽃으로 꽃반지를 만들어 끼거나 책갈피에 끼워 말려 삽화를 만들어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 속에 넣어 보내곤 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움 중에 꽃을 따라가는 것이 있을까? 오랑캐꽃의 그 고운 빛깔과 섬세하고 여린 꽃잎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순간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죽어 가는 꽃과 한순간 무대에 올라 영혼과 몸을 불태우고 스러지는 조명과 함께 사라지는 l회 성의 예술은 비슷한 단명의 피조물이 아닐까.
우리 무용가들은 공연이 끝나고 나면 자주 꽃을 받는다. 공연이 끝난 뒤의 공허감 속에 꽃을 가슴에 안고 달빛이 총총한 밤거리로 걸어나오면 저절로 아! 꽃과도 같은 삶이여, 하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곧 우린 다시 또 다른 무대를 꿈꾼다. 때로 나는 꽃의 단명함이 안타 까와 꽃들을 굵은 무명실로 '잡아맨 후 바람이 통하는 창가에 거꾸로 매달아 말린다. 그래서 나의 방 구석 구석에는 마른 꽃들이 가득하다.
비록 말린 것일지라도 꽃은 아름답다. 더욱 수줍은 듯 풀 속에 솟아나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 채 스러지거나 무심한 발길에 밟혀 없어지는 오랑캐꽃에 나는 깊은 애정을 느낀다
오랑캐꽃의 꽃말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곁에 있는 다정한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꽃이다.
올해도 나는 오랑캐꽃을 찾아 학교뒷산을 헤맸다. 먼 곳에 살고있는 친구에게 띄울 편지 속에 넣어 보낼 눌린 꽃을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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