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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피해 이주해 온 정감록파의 후예 영주군 풍기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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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군데군데 황토가 드러난 메마른 언덕이 동남으로 눕고 그 안쪽에 분지를 이루었다. 방향없는 봄바람이 벌판 저쪽에서부터 먼지를 말아 올린다.
『풍기 아니가. 바람 참 많은 곳이라.』
해발1천m를 줄먹이는 소백준령이 6백79m로 낮아진 곳이 대재(죽령). 문경새재와 함께 기호·영남을 잇는 2대 관문이다. 고개를 넘은 기차는 숨이 찬 듯 긴 한숨을 토하며 역구내로 들어선다.

<"내륙의 삼다향"지칭>
경북 영주군 풍기읍-.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 많은 내륙의 삼다향(삼다향). 전국 인삼의 10분의1을 소출 하는 소문난 인삼고장.
그러나 풍기는 그보다는 난시(난시)에 몸을 보존하는 피난향(피난향)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래서 「제2의 계룡산」「또 하나의 신도안」으로 불린다.
『풍기사람은 8할이 외지인이라예. 감록파(감록파)라 안합니꺼』
정감록의 예언이 오늘의 이 마을을 있게 했고 성격을 결정지었다. 전국8도에서 1백년 안쪽에 피난 온 사람들이 경상도 안에 이방인촌을 세운 셈이다.
『나도 원래 고향이 김해라예. 할아버지 때 이사안왔읍니꺼. 난리 피한다고예. 피안도(평안도)가 제일 많고 다음이 함경도 아바이이고…이북출신이 절반 넘을 것이라예.』
읍 총무계장 김용기씨(46)는 읍사무소직원 34명 가운데 토박이 풍기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며 웃는다. 모두가 난리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이주한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
조선조 중엽, 희망 없는 정치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새것을 열망하는 민중의 바람이 풍수도참설과 융합. 정감록을 탄생시켰다.
그는 한양이씨5백년 다음에 계롱산정씨 8백년 왕조를 예언한다. 그리고 이씨5백명이 무너지고 정씨8백년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큰 난리가 있을 것이며 그때 난리를 피해 보신(보신)할 수 있는 10곳(10승지)을 열거했다.
그 첫번째가 풍기 금계동.
『풍기가 왜 10승지의 첫번째로 꼽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풍기는 큰 난리를 별로 겪지 않은 곳입니다.』
평북 박천에서 아버지 때 이주, 지금은 영주·안동 등 경북북부지방의 향토사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영주군지를 편찬하기도한 송지향씨(64·풍기읍 서부동)는 고려시절 3차례의 거란(거란)란, 6차례의 몽고란 때, 경주까지도 적병이 침입했지만 풍기만 화를 면했다고 설명한다. 또 임란 때도 왜군이 바로 이웃인 안동까지 들어왔으나 이곳은 무사했고 가까이는 6·25때도 다른 곳에 비해 큰 피해가 없어 경험적으로 「피난지」임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물이 많은 산간분지라 홍수와는 거리가 멀고 큰 재(영)아래 있어 가뭄에도 간간 소나기가 뿌리니 이른바 삼재(삼재-병화·흉년·악질)가 들지 않는 땅-.
『한말에 이주한 사람이 가장 많고 일제 때도 산발적으로 옮겨왔지요. 일부는 해방 후 6·25전후해 피난 왔다 눌러 앉은 사람들입니다.』

<말 안통해 애먹기도>
송씨 일가는 임오군란 직후 평북 박천에서 30여가구가 몇햇동안에 집단이주 했다고 했다.
현 문예진흥원장인 송지영씨도 바로 그 일문. 전 청와대경호실장 김규원씨 또한 평안도 영변에서 이주한 가계다.
지금은 6·25때 정착한 사람들도 한세대를 지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
『처음 온 직원들은 호구조사를 나가면 말이 안통해 애를 먹었는기라예. 지금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고향사투리를 쓰지예』
애초 이방인들의 집단이주가 시작됐을 때는 보이지 않는 차별도 없지 않았다. 특히 숫적으로 가장 많은 평안도사람들을 토박이들은 「평치」라고 불러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피난민은 늘고 토박이는 줄어 주객이 바뀐지 오래다. 오늘의 풍기는 모두 이들 외지인들이 이루어 놓았다. 풍기의 대명사인 인삼조차도 개성에서 온 이주민에 의해 재배가 시작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읍으로써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77개나 되는 직물공장이 풍기의 또 하나 자랑. 인삼과 함께 부의 2대원천이지만 이 또한 피난민의 것.
평안도에서도 명주·항라의 본고장인 영월·덕천 출신들이 그 솜씨를 이곳에 심은 것이다. 요즘은 인조견에 주력해 연간 3천만 야드를 생산, 4백50만달러의 수출실력을 올리고 있다.
황씨가 많이 살아 「풍다」「석다」「황다」로 바뀐 것도 이들 77개 인견직공장에 근무하는 1천여명의 여자종업원들 때문. 이 직물공장 가운데 2개를 뺀 75개가 모두 평안도사람 경영이다. 풍도의 상권은 평안도 출신이 쥐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은 같은 고향사람끼리만 했지요.』지금은 그런 보이지 않는 벽도 무너지고 풍기사람으로 하나가 돼가는 것 같다는 송지향씨는 『이다음 통일이 되더라도 풍기에 눌러 살겠다.』고 한다.

<"인심 야박하다" 평도>
할아버지 때 제도에서 이사왔다는 주민 이승우씨(39)는 요새 사람들이 어디 정감록 같은걸 믿느냐며 도참설 따위는 시큰둥하게 생각한다.
계룡산 신부안이 정씨 8백년의 왕도로 새 나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모여든 적극적인 사람들이라면 풍기는 새나라가 오기 전 혼란기에 한 몸과 가정을 온전히 지키려는 조금은 소극적인 성향의 마을이다.
외지인이 모이다보니 조금은 『인심이 야박하다』는 평도 듣지만 앉아서 기다리는 정감록의 신앙이 무너졌을 때 피난민들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경북도 내에서도 손꼽는 잘사는 고장을 만들었다.
개벽은 오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풍기사람들은 보여준다. 【풍기=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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