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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희옥 동국대 총장·전 헌법재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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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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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설악 무산 조오현(1932~ )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 조실(祖室) 스님과는 20여 년 전 서울지방검찰청 평검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가르침을 받아왔다. 며칠 전에도 백담사에서 뵙고 좋은 말씀을 들었다. 모든 사물은 관계·인연에 의해서 생성·변화·소멸한다. 이 세상에 항상(恒常)한 것은 없다. 정보기술(IT) 산업의 선구자 스티브 잡스는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라고 했다. 이러한 무상변화와 생멸이 끊어진 자리가 바로 적멸(寂滅)이다. 적멸은 영원한 평화·안온·평온을 말한다. 선승이신 시인은 시조의 형식을 변형 확대한 3장 6연의 이 시에서 적멸을 향한 비장한 결단을 곱게 나타내고 있다.

 오늘 아침 다시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에 이르는 연기법을 역·순관으로 들여다보니 역시 세상 모든 사물은 하나이다. 먼지 티끌 속에 무한 우주가 있고 우주 일체가 하나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꼭 같이 소중한 존재이다. 그것이 벌레이든 고등동물이든 하찮고 보잘것없어 무시해도 되는 존재는 없다. ‘이 다음 숲’에서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는 것은 생명공동체의 모든 것을 사랑·포용하고 생멸이 끊어진 영원한 평화, 즉 적멸을 향하는 성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음 숲’에서 무엇으로 가야 할 것인가. 김희옥 동국대 총장·전 헌법재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