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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폭력 「프로」 미국서도 자제 움직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얼마 전 「뉴욕」시내에서 9살 짜리 철부지가 플라스틱 장난감 권총으로 은행원을 위협, 1백달러(약6만7천원)를 빼앗아 간 사건은 미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범행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다가 경찰에 잡힌 소년 강도는 『군것질을 하려고 텔레비전 방송에서 본 대로 흉내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미국식으로 「샤른킬」(슈트·앤드·킬드=쏘아죽였다)이라고 혓바닥을 굴리며 매끄럽게 나오는 그 말은 어린이들이 가장먼저 배우는 말 가운데하나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방송 뉴스에서 가장 흔하게 들리는 말이 『쏘아 죽였다』이고,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영화나 드라마는 거의 없다. 아이들이 그 말을 저절로 배울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대로 흉내내려는 것도 오히려 자연스럽다. 미국 텔레비전 프로는 그 내용이 선정적이기보다는 폭력적이고 잔혹하며, 범죄수법을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한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한국에서도 방영되고있는 『형사 스타스키와 허치』나 『기동순찰대』(CHIPS)란 영화에선 기발한 범죄수법이 소상하게 소개될 뿐 아니라 폭력이 난무한다.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대결한다는 서부의 전통도 무너져 이젠 툭하면 등뒤에서 총질을 한다.
시청자들도 만성중독이 돼 왠만한 자극에는 끄떡도 않을 정도다. 그래서 「리얼」하게 묘사한다는 것이 총이나 칼에 맞는 정면과 선혈을 사방으로 튀기는 끔찍한 장면을 클로즈업시킨다.
미국서 24분마다 살인사건이 한 건씩 일어나고, 강간사건은 7분에 한 건 골로, 강도사건은 10초에 한 건씩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 미국TV에도 방송윤리규정이란 것이 있다. 18세 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성인용 프로그램을 제공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특히 농도가 짙은 섹스 물이나 적용되고 폭력·수사 물에는 관대한 편이다. 영화의 경우, 18세 이하가 무제한 입장할 수 있는 G급과 부모가 동반하면 입장이 가능한 PG급, 입장불가인 R급 등 3등급으로 분류된다. TV에서도 이 원칙을 원용해서 『18세 이하의 청소년은 시청을 삼가라』는 안내자막을 내보내긴 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다.
미국에서 최근 수년사이에 범죄발생률이 연평균 8∼10%꼴로 늘어나자 무절제한 TV프로그램이 청소년범죄를 증가시키는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직 근본적인 대책은 수립되지 못했지만 자녀들의 TV시청에 대한 부모들의 감독이 엄격해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기왕에 제작된 저질의 폭력물이 미국과는 다른 가치관과 윤리관을 가진 외국으로 수출되어 무비판적으로 방영될 때, 그 사회 특히 청소년들에게 끼칠 폐해가 더 큰 문제다.
미국에서라면 수십 개의 TV채널에서 양질의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 나라와 같이 2∼3개 채널이 일방적으로 공급될 경우에는 프로그램의 선정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한다. 본바닥에서조차도 인기가 떨어지고 말썽이 되고있는 저질프로그램을 무비판적으로 방영하는 것은 「TV공해」를 더해줄 뿐이다. 『스타워즈』류의 공상과학영화나 『월튼네사람들』과 『초원의 집』같은 프로그램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음미해야할 때다. 【뉴욕=김재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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