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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동본결혼, 어떻게 해야 하나|찬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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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성동본끼리는 결혼할 수 없는가. 금혼 원칙(민법 제809조)에 묶인 동성동본 부부를 위해 78년 한해동안 임시특례법에 따라 구제됐으나 아직도 혼인 신고를 못한 동성동본 부부는 약20만 명. 더구나 혼인신고도 못하고 자녀들이 법률상 사생아가 돼 버린 한 동성동본 부부가 최근 자살 극을 벌임으로써 해묵은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이에 금혼 제도는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동성동본 찬성론자와 엄연한 전통문화는 지켜져야 한다는 반대론자 주장을 들어본다.
혼인은 직접적으로는 인간의 종족보존의 본능에 기초한 남녀의 결합관계이나 언제나 일정한 법률·관습·종교 등의 형식으로 수용하는 사회적 제도다.
혼인은 사회발전에 따라 난혼·군혼·일처다부 혼·일부다처 혼을 거쳐 일부일처 혼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남자가 전권 적인 가부장제사회의 특색인 일부다처제가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다.
일정한 근친사이에 혼인을 금하는 것은 세계공통으로서 그 연원은 멀리 미개시대의 씨족 외혼의「터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혈연적 구성이 강한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성 불 혼의 원칙이 지켜져 왔다. 중국에서는 이 원칙이 대체로 주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한 대에 와서 확정적으로 성립되었다. 명나라는 대명률에 이를 명시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이 대명률에 따라 동성 혼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우리나라의 그 이전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계급적 내혼 제가 성행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계급적 내혼 제, 특히 왕가·왕족사이에서 동성 혼과 근친혼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동성동본 불 혼의 원칙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물임이 틀림없다. 이조 영조 때는 이 원칙을 더욱 철저히 하기 위하여 동성이관자의 혼인도 금지하는 규정을 속대 전에 두었으나 그후 형법대전에는 씨 관이 같은 동성동본인 부계혈족사이의 혼인만을 금지하였다. 동성동본 금 혼의 원칙이 생긴 연유를 보면 고대에 인구가 매우 희소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한 부락에 사는 동성 자는 거의 근친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면과 우생학적인 견지에서 혼인을 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총인구 2, 3백만 명 시대에 반상의 계급적 내혼이 철저했던 이조시대와 인구 5천만 명을 헤아릴 뿐 아니라 각국의 문턱이 낮아져 지역적으로도 생활권이 세계로 뻗어 가는 현재의 개방사회와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시조를 같이한다는 사유만으로 근친자도 아니고 또한 우생학적인 장애도 없는 수많은 남녀에게 그 의사에 반하여 금혼을 규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성금혼 원칙의 기원 지인 중국에서도 이 원칙을 이미 폐지하고 근친혼동의 금혼 만을 규제하고 있고 일본·독일·「스위스」·「프랑스」등 역시 근친혼만을 규제할 뿐 우리의 동성동본 금혼 제도와 같은 입법 예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의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그 금지범위가 남계혈통 중심이기 때문에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나고▲그 금지범위가 지나치게 넓기 때문에 현대시민의 중대한 자유인 혼인의 자유를 너무 유린하며▲동성동본인 혈족의 기본이 되는 우리나라의 성은 주 대 이후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서민층에서는 이조중엽까지 성을 갖지 못했던 점등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하루빨리 동성동본 금 혼의 원칙을 폐지하여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과거 민법 초안을 만들 때 정부는 원칙적으로 동성동본불혼 원칙을 유지하되 선조의 계통이 같지 아니하는 경우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고 법사위에서는 이 원칙을 폐지하고 근친혼에 한하여 금지하는 수정안을 제출한 일이 있었으나 당시 보수적인 국회철원들이 이 수정안이나 정부안의 단서조항을 부결시켜 버렸는데 하루속히 그 개 정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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