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장품 조향사 양해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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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양해주씨(34·경기도 안양시 석수동101의6)에게 겨울은 남달리 싫은 계절이다. 특히 지난 겨울처럼 날씨가 추워서 감기 걸릴 위험이 많은 해는 딱 질색이다.
같은 감기라도 목감기나 몸살감기쯤은 관계없지만 코감기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직업인으로서 양씨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이다. 냄새를 맡을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냄새를 맡으면서 이 향료와 저 향료를 섞어가며 새로운 향냄새를 개발하는 직업. 「태평양화학 향료연구실 주임 조향사」가 그의 직함이다.
화장품을 안 쓰는 여성은 거의 없고 향료가 들어가지 않는 화장품도 드물다. 그렇게 양씨가 자리잡은 곳은 여성미의 뒤안. 그는 그 길을 7년째 걷고있다.
현재 양씨가 알고 구분해 낼 수 있는 냄새는 향냄새만 4백여종. 보통사람은 매운 것 단것까지 합해도 겨우 10여종에 불과하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인연으로 향료연구실에 배치된 75년2월에는 양씨도 물론 10여종의 냄새밖에 구분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화공약품이나 배합하고 새로운 반응을 연구하는데는 스스로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 수많은 향료의 냄새를 모르고는 새로운 향냄새를 개발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시작한게 코의 훈련이었다.
각각 작은 유리병 속에 담긴 20종의 향료-이것이 양씨가 출근 첫날 선배로부터 받은 훈련 과제물이었다.
과제물은 냄새가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것들이었는데도 처음에는 이 냄새가 저 냄새 같고 그 냄새가 이 냄새 같았다. 더구나 회사 건물 안에는 항상 화장품 냄새가 충만해있어서 과제물냄새를 익히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회사 옥상을 주로 이용했습니다.』그곳에는 바람이 잘 통해 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종일 20개의 향료병과 씨름을 했다. 집에도 가지고 가서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냄새를 빨리 익히겠다고 한 냄새를 계속 오래 맡아서도 안 된다. 사람은 대개 한가지의 냄새를 3분 이상 짙게 계속해서 맡을 경우 얼마동안은 다른 냄새를 구별할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3분 가량 계속 맡고 3분 가량은 쉬었다.
그렇게 종일을 짙은 향냄새 속에서 살다보니 온몸이 냄새에 절어 「버스」를 타면 모두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사내가 겨우 한다는 짓이…하는 생각이 치밀기도 했어요.』
그 20종의 향냄새를 익히는데 꼬박 20일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로 뚜렷이 냄새가 다른 그 20가지 향료 하나 하나마다 이웃이 되는 비슷한 냄새들이 양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가 가장 힘든 고비지요.』
흔히 1단계 훈련기간이라고 부르는 6개월 동안 양씨는 이를 악물고 1백50종의 향냄새를 익히는데 성공한다.
사람의 코는 두뇌와 같아서 훈련만 시키면 얼마든지. 개발이 가능 하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냄새를 익혀야할 향료는 너무나 많다. 현재 알려진 것만도 천연향료 1천5백 종에 합성향료 6백 종 해서 2천여 종.l급 조향사인 양씨가 지금도 틈틈이 냄새맡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향료라고 해서 모두 냄새가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 장미의 경우 미량까지 따지면 2백여 종이나 되는 각가지 단향으로 구성돼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인 「알데히드-C-8」이란 단향은 꼭 생선 썩는 냄새가 난다.
또 「자스민」의 단향 가운데 「인돌」이란 향은 인분 썩는 냄새와 비슷하다. 그런 기상천외의 냄새들이 합해져서 장미나 「자스민」의 황홀한 냄새를 내는 것이다.
그 단향들이 똑같은 양으로 섞여있는 것도 아니다. 조향사들이 A라는 단향과 B라는 단향을 섞을 경우 비율이 1대1이었을 때와 1대2 또는 2대1이었을 때 모두 다른 냄새가 되는 것. 그 가운데 어떤 냄새가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문제는 어떤 단향들을 어떤 비율로 섞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보다 싼 새로운 향을 조합해내느냐는 것. 그게 바로 조향사들의 임무다.
우리 나라에 있는 단향은 현재 겨우 5백여종. 78년, 4개월에 걸친 양씨의 해외연수도 바로 국내에 없는 새로운 향냄새에 익숙해지려는 「코의 해외 유학」이었다. 「스위스」의 「지보단」, 「프랑스」의 「그라스」, 일본의 「하세가와」 등 세계굴지의 향료회사를 거치면서 양씨는 조향사로서의 능력과 긍지를 길렀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필요한 향료의 90%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있지만 그들 나라는 이미 끊임없는 조향기술의 개발로 전 세계 여성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양씨도 그동안 많은 향료를 조합해냈고 요즘도 매년 50건 정도는 새로운 향료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조향에 관계하고있는 사람은 50여명 정도. 그 가운데 실제로 향을 조합하고 개발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 같은 경우는 향의 천연자원이 부족한데도 유능한 조향사를 많이 양성함으로써 오래 전에 향료의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우리도 유능한 조향사가 많이 양성돼야겠어요. 우리라고 향료수출국이 못되란 법 없지 않아요?』향료수출국으로 가는 주역, 그것은 양씨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직업 자체에 대한 정열이 대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무실에서나 휴일의 등산길에서나 풀잎·나뭇가지·「볼펜」에 「라이터」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맨 먼저 코로 가져가는 것도 그렇게 생긴 습벽 같다고 양씨는 말한다. 「버스」를 타도 맨 먼저 무의식적으로 냄새를 맡는다. 어떤 여성에게서 어떤 화장품 냄새가날 때 『아, 이건 내가 지난달 사흘 밤을 새워 만든 냄새로구나』하며 뿌듯한 보람에 젖는다.
끝으로 여성화장에 대해서 양씨는 『정치나 경제 등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만 여성화장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말을 맺는다.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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