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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어딘가에 사람이 사는 한 연극은 이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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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호 06면

“호적이 잘못된 거지, 내 나이가 여든이에요. 2년 전에 넘어져 한달 반 동안 입원을 했는데, 신기하게 앓았던 기억이 없어졌어요.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더 오래 살 것 같아.”

연출 데뷔 60년, 연극계 대부 임영웅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무더운 여름 내내 연습실을 지키고 선 백발의 노 연출가는 행복해 보였다. 체력이 달리지 않느냐 물으니 “내가 좋아서 하는데 누굴 원망하느냐”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78)이 연출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그간 길러낸 후배들도 이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신시 컴퍼니 박명성 대표, 배우 손숙,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등이다. 이들 ‘임영웅 사단’이 뭉쳐 헌정 무대를 마련했다. 연극 ‘가을 소나타’(8월 22일~9월 6일, 대학로예술극장)다. 임씨가 연출을 맡았다.

“60년 했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60년이나 좋아하는 연극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할 뿐이죠.”

1955년 동랑 유치진의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했지만, 중학시절 국어교사였던 조흔파 선생의 권유로 연극반에 들어간 이래로 연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을 걸어왔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 덕인 것 같아. 구경 다니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 아이스케키 하나 사주고 극장이며 영화관을 꼭 데리고 다니셨거든. 나중엔 불량학생이 돼서 혼자 돌아다니며 성인극까지 다 섭렵했지만…. 허허.”

운명처럼 연극을 시작했지만 그 시절도 연극으로 먹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신문기자, 방송사 PD로 돈을 벌면서 연극판을 지켰다. 66년 국내 창작 뮤지컬 1호 ‘살짜기 옵서예’, 69년 국내 초연 이래 45년간 공연되고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모두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고도’를 멈추지 않는 건 20세기 최고의 희곡이기 때문이죠. 연극이란 인간을 그리는 건데, 현대에는 하도 별 사람이 다 있으니 인간을 그리기가 아주 어려워. ‘고도’는 현대인의 전형을 잘 담고 있어요. 인생이란 뭐냐를 그만큼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도 없는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그런 것 같아.”

60년 연극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연극이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 한 편의 좋은 연극이 한 사람의 인생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연극이란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작품 속에 많은 인생이 있지만 ‘인생은 틀렸다’라는 연극 봤나요? 좌절 속에도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게 연극이죠.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런 일깨움을 얻으면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격이라도 언젠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만드는 거에요.”

85년 세운 산울림소극장은 지난 30년간 한국 연극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순수연극의 대명사가 됐고, 현재 그의 두 자녀가 극장장과 예술감독을 맡아 대를 잇고 있다. “인건비 줄이려고 식구를 동원한 건데…(웃음). 사실 딸은 그림을 그렸어요. 내 딴엔 연극 소품 만들라고 미술을 시켰는데, 어려서는 애비 일을 마땅치 않아 하더라고. 만날 집에서 가구나 가져나가고 어수선하니까….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더니 동포들이 ‘산울림’을 다 알더라는 거에요. 아버지가 허망한 일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애.”

평생 별다른 계획을 세워 본 적이 없지만 오늘까지 연극을 하며 살 수 있는 건 기자 시절 만난 부인 오증자(77) 서울여대 명예교수의 공이란다. “나한테 속아서 결혼한 거죠. 먹고 살려고 부업 삼은 게 신문기자였으니. 나중에 전업으로 나설 때는 자기가 교직에 있으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더군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했겠지만(웃음). 그때 반대 안 한 게 현명했지. 이놈은 연극 아니면 못 살겠다 싶었나봐요. 여하튼 덕분에 맘놓고 매진할 수 있었어요.”

‘가을 소나타’는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 성취욕이 강한 피아니스트 모녀의 갈등을 그린 리얼리즘 드라마다. 베리만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베리만은 원래 스웨덴 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연극인이에요. 이 작품도 원래 연극이 먼저인데 한국에선 영화만 유명하지. 매체가 다양해졌지만 드라마의 시초는 연극이란 걸 기억했으면 해요. 이제 냄새 나는 영화까지 나온다는데, 그건 메커니즘일 뿐 드라마의 기본은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지구에 사람이 사는 한 어떤 형태로든 연극은 건재할 겁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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