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작가 몫 평가는 관객 몫 아직도 모르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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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호 21면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의 본산이었지만 지금은 시에서 파산 신청을 할 정도로 쇠락한 미국 중서부 도시 디트로이트. 그래도 아직까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디트로이트 미술관(Detroit Institute of Arts, DIA) 덕이 크다. 그 DIA에서도 미술학도와 애호가들이 순례자처럼 들르는 곳이 2층 리베라 코트다. 멕시코 민중미술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그린 초대형 벽화 ‘디트로이트 인더스트리(Detroit Industry)’가 있는 방이다.

컬처# : 광주비엔날레 ‘세월오월’ 전시 유보 유감

이 작품은 1930년대 포드 자동차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다. 대형 패널 27개가 거대한 방 전체를 둘러싼 규모도 물론이거니와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 현장의 모습이 생생하기 그지없어 그림 앞에 서면 ‘압도된다’는 표현 외에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 초 직접 볼 기회가 있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를 떠올리게 된 건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기념전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 잡음의 내용은 이렇다. 특별전에 참여한 홍성담 화백이 걸개그림 ‘세월오월’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김기춘 비서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허수아비로 묘사했다.

홍 화백은 이미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을 그려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놀란 주최 측은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홍 화백은 박 대통령이 그려진 위에 테이프로 닭 그림을 그려 붙였다. 그림이 수정된 후에도 전시 여부를 놓고 회의가 열렸고, 책임 큐레이터가 사퇴했다. 사실상의 검열 소식에 국내·외 작가들은 작품을 철수하겠다고 나섰다. 광주비엔날레 재단은 다음달 공청회를 열어 전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파장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완성된 1933년 디트로이트도 조용하진 않았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빨갱이’나 다름없던 리베라가 자본주의의 상징 격인 디트로이트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부터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시의 성직자들은 “신성모독”이라며 들고 일어났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입회 하에 의사로부터 예방접종을 받는 장면이 문제였다.

문제는 그림 속 아기의 금발머리였다. 이것이 일종의 후광처럼 보였기에 성직자들은 이 아기가 예수이고 부모는 요셉과 성모마리아라고 생각했다. 성(聖)가족이 부적절하게 묘사됐다고 여긴 성직자들은 이 그림을 상스럽다고 비난했다. 평론가들도 벽화 속 누드에 대해 “포르노”라고 지적했으며 일부 보수층은 흑인이 그림에 들어간 데 경악했다. “미국적이지 않다”“디트로이트에 대한 모욕이다”“공산주의 선언이다”. 비판은 차고 넘쳤다.

인상적인 건 당시 DIA의 두 주요 인물이 대응한 태도다. 한 명은 당시의 보수적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모험을 시도한 윌리엄 발렌티너 DIA 관장이다. 다른 하나는 전문가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 DIA의 주요 후원자 에젤 포드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아들 에젤은 벽화 공개 후 벌어진 엄청난 논란에 이 한 마디로 대응했다. “나는 리베라의 작품을 존경한다.”

논란은 이내 수그러들었고 DIA엔 벽화를 보기 위해 하루 1만 명이 넘는 기록적인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벽화는 DIA의 간판스타로서 이곳을 찾는 수많은 세계인에게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세월오월’ 파문의 쟁점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행사에서 관객이 작품을 보고 평가할 자유를 주최 측이 ‘알아서’ 빼앗았다는 게 진짜 문제다. 예술성을 판단하는 건 관객 몫으로 남겨뒀어야 한다. 홍 화백의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미술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세월오월’이 논란 없이 그냥 전시됐다면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그림을 원래대로 전시하고 평가는 관객에게 맡기면 어떨까. 이유가 있으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잊혀질 일이다. 누가 관객에게서 작품을 평가할 자유를 빼앗는가.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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