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서양화 오지호씨 일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남 화순군 동복면. 무등산의 여맥인 운월치·모후산·두주치가 온 마을을 감싸듯 두르고 있고, 그 아래 넓게 펼쳐진 동복평야복판을 동복천의 맑은 물이 꿰뚫고 흐르는 이곳은 예부터 천년무변의 피난지로 알려져 온 오지. 기름진 동복평야에서 나는 풍부한 곡물과 동복삼복(꿀·인삼·모란)으로 불리는 특산물을 바탕으로 만석꾼·천석꾼 집안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부자마을이다.
마을 남쪽 모후산 기슭의 오씨 종가를 찾았을 때, 모후산인 오지호 화백은 마침 집안족보를 정리하고 있던 중. 『동보오씨대동보』라 쓴 두꺼운 책 서너 권이 방바닥에 널려있는 사랑방에서 손자 상욱씨와 기자일행을 반가이 맞은 노 화백은 마치 어린애 같은 맑은 눈에 그 특유의 웃음을 가득 띠며 집안내력에 대해서부터 말문을 연다.

<선친도 일본에 유학>
『우리는 동복오씨 남현파 종가로 이곳에서 11대, 지금 이 집터만도 4백년이 넘어요. 집안 뒤꼍의 사당에는 위로 4대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울안에 4백년 된 은행나무,3백년 된 감나무들이 집안의 긴 내력을 말해주고 있지요.』
오 화백은 1905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오씨 집안 4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부친 오재영은 일찌기 국비유학생으로 도일, 새로운 문물에 눈뜬 선각자로, 후에 보성군수를 지냈다.
『세분 형님중 위로 두 분이 20전에 요절, 부친은 「그저 오래만 살아라」하고 아명을 점수라고 「목숨 수」자를 붙였죠. 그 덕인지 몇 번 고비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온 셈이죠, 하하.』
부친이 세상을 떠난 것은 점수소년이 l5세 나던 해. l919년 서울로 고종의 인산에 다녀온 부친은 비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유언 한마디 없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다음해, 점수소년은 이 슬픔을 딛고 일어나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떠나, 전주고보를 거쳐 서울 휘문에 들어갔다. 오 화백이 그림에 대한 뜻을 굳힌 것이 바로 휘문시절. 당시 휘문에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춘곡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와 있었는데 춘곡이 원래의 서양화를 버리고 시류에 영합 동양화로 돈 것에 반발. 『나는 반드시 서양화로 무언가를 이뤄보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에 오 화백 특유의 생활철학인 『한번 뜻을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 만다』는 굳은 신념이 가세, 휘문졸업과 함께 순전히 「자기 뜻만으로」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휘문 졸업 후 바로 동경으로 가서 천단미술학교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이 26년의 일이죠. 이때 학교선택·입학수속 등 모든 것을 나 혼자서 결정했어요. 예나 지금이나「내 뜻대로」사는 거죠.』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28년, 오 화백은 김주경·박광진 등과 조선인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인 녹향회를 창립, 이른바 민족미술수립운동을 벌였다. 이때부터 그는 인상파적 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민족주의적 회화이념」을 자신의 예술가적 입장으로 삼았다.
『31년 미술학교졸업 후 곧바로 귀국, 고향에 묻혀 그리운 고향 모습을 원 없이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조용한 마을, 순박하디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맘껏 그렸죠. 그러나 이런 생활을 오래할 수는 없었어요. 경제적 문제 때문이죠. 그래서 3년쯤 있다가 서울을 거쳐 개성 송도고보로 갔지요.』

<최초의 원색화집내>
35년부터 44년까지 개성에 머무는 동안 오 화백은 한때 위궤양으로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이를 단식으로 극복하고(그 후 그의 건강비결이 됐다), 그 특유의 회화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38년에는 친우 김주경과 공동으로 한국최초의 원색화집을 내는 등 고귀한 성과를 거뒀다.
『해방 후 서울에 와서 나름대로 일을 좀 해보려했지만 좌우의 소용돌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주로 낙향했지요.』
그러던 중 48년 광주 조선대학이 당시 지방대학으로선 드물게 예술계통학과를 두기 위해 광주에 와있던 오 화백을 초청했고, 그는 「순전히 예술가적 정열」만으로 이에 참여, 58년 그만둘 때까지 10년 동안 그 후 호남예술을 이끈 숱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의 미학론은 비단 화가로서가 아니라 그의 문명비평가로서의 면목까지 엿볼 수 있도록 하는데, 색채를 중시하고 비구상을 배격하는 그의 회화관, 생명본성의 현실로서의 예술, 가변적지성의 세계에 대한 불변적 감성세계의 묘사로서의 예술, 그리고 필생의, 대사업으로 여기고 있는 한자교육실시의 필요성에관한 그 특유의 문자문화론 등 그의 관심이 닿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다.
오 화백은 슬하에 모두 3남5녀를 뒀는데, 차남 승우(52)와 3남 승윤(43)씨가 부친의 화업을 이었다.
승우씨는 조선대를 거쳐 국전에 연4회 특선, 5·16민족상을 받은 국전 초대작가며, 승윤씨는 홍대를 나와 국전 6회 특선에 현재 전남대교수로 재직 중 최근 6개월 예정으로 「파리」에 가 있다.
이들은 모두 부친의 영향으로 비구상쪽. 결과적으로 『비구상이 미술일순 있어도 회화일순 없다』는 부친의 확고한 회화관을 따른 것이나 『그들에게 한번도 내 생각을 강요한 적은 없다』는 것이 오 화백의 얘기다.

<단식으로 건강 지켜>
오씨 화맥 3대의 마지막 대는 승우씨의 두 아들 병욱(24) 상욱(23)형제가 잇고 있는데, 병욱씨는 서울대학원회화과 재학중이고 상욱씨는 금년에 홍대대학원 조소과에 입학했다.
『재료를 직접 손에 만질 수 있다는 것, 또 흙 만지는 일이 좋아 집안사람들과 달리 조소 쪽을 택했다』는 상욱씨는 『집안의 전통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는 일』이라고 집안전통에 대한 개성의 우위(?)를 강조한다.
지금도 매년 1회의 단식으로 건강을 지키고 틈나는 대로 애마 「무등」을 타고 영산강 둑을 달린다는 오 화백은 근래에는 두통 때문에 하루 1시간 정도밖에 화필을 못 잡는다고. l5세 때 결혼, 6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지량진 여사(74)와는 마치 남매처럼 다정하다.
「회화수업에 있어 영원불변의 진리」로서 『많이 그리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할 것』을 후진에게 충고하는 오 화백은 그의 또 하나의 미학 논저 『미와 회화의 과학』의 출판준비로 요즘을 보낸다면서, 『전혀 우연스럽게 이뤄진 화맥 3대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흐뭇해한다. <정우양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