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6)|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 <제자=필자>(54)|「조일」주정 기자와 회견|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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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런 일반론보다 『좀더 구체적으로-,』하고 「사까이」는 다음 말을 재촉한다.
『어제 저녁 이 「호스텔」에 와서 「샤워」를 썼는데요, 물 한방울이 아깝더군요.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는 공동 수도에 물 받을 차례를 기다리느라고 장사진이지요…. 4, 5명 가족이 살아가려면 적어도 1백20만∼1백30만환이 필요한데요. 중학교 선생의 월급은 겨우 8만∼9만환-나머지 백여만환은 후원회가 부담하지요. 관리라고 월급만으로 살아갈 재간이 있나요? 때로는 뇌물도 오가지요. 물론 청렴한 관리도 없는 건 아니지만-.』 「사까이」 기자에게 내가 아는 구체적인 청백리 몇 사람의 얘기를 한 뒤에 나는 말을 이었다.
『36년 동안 물들인 일본색을 구축하려고 애들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말로 하듯 쉬운 노릇은 아니지요. 「스시」「덴뿌라」도 건재하구요.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쓰는 사람도 많으니 「다다미」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이런 의식주에 남아 있는 일본색은 별로 문제삼을게 없다고 봅니다. 「마카로니」를 먹는다고 해서 「이탈리아」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요는 민족 정신이 하루바삐 건강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그 점인데, 여기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겠지요. 일조일석에는 어려운 문제니까요-.』 「사까이」는 내 말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오늘 낮에 「긴자」니 「마루노우찌」 일대를 둘러 왔지요. 일본의 부흥이 눈부시더군요.
「싱마루비루」 같은 고층 건물이며 고속도로들이 여기저기 생기고 백화점 윈도에는 호화스런 상품들이 그득하고-, 언제 일본이 패전했었냐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겨우 7년 동안에 일본이 이토록 급속히 원폭을 회복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소위 특수 경기라고 해서 한국 동란으로 일본의 경제가 숨을 들렸다는 그런 요행도 있기야 했지만, 하옇든 놀라운 일입니다. 「선데이매일」 좌담 기사에는 「일본은 천국, 한국은 지옥」이라는 그런 대문이 있었지만, 미상불 겉으로 본 일본은 천국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과는 도저히 비할 나위도 없지요-.』
「사까이」 기자 곁에서는 사진 기자가 커다란 카메라를 움켜쥐고 여러 차례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죽으로 본 일본이고요, 오늘 아침 조간에는 노동자의 자살이 2건, 자동차 강도가 하나, 커다랗게 실려 있더군요. 한국 같은 지옥이면 몰라도 천국 일본에 사는 백성이 왜 자살을 하는 거지요? 어떤 친구가 날더러 밤길에서 젊은 친구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시키더군요. 「천원」 한 장으로 사람을 죽이기가 예사라구요. 한국 같은 가난하고 어지러운 나라라면 혹시 모를 일이지만 천국 일본이 왜 이럴까요…. 한국은 이를테면 「악성 피부병」-, 「옥시풀」에다 좋은 고약만 있으면 피부병은 낫지요. 그러나 일본을 척추 「카리에스」라고 한다면 실비가 될까요? 끌 수 깊이 뿌리를 박은 질환은 그냥 뒤두고 거죽 단장에만 급급한 감이 드는군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두고 보아야할 일이지요 마는 그 점에도 나는 기우를 품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 나라에 「달아 매인 돼지가 누워있는 돼지를 비웃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내 이런 염려가 그 속담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일본을 위해서 얼마나 다행일까요-.』
그날에서 30년이 지난 오늘, 만일에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지금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는지-, 그것은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는 나 자신 일본을 그렇게 보았다. -한국은 피부병, 일본은 척추「카리에스」라고 한말은 결코 일석의 궤변이나 허장 성세는 아니었다.
신문 기자가 알아들을 말인지 아닌지-, 그런 것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사진 기자는 아직도 모자란다는 듯이 「셔터」 「찬스」를 노리고 있다. 「사까이」 기자는 여전히 연필로 「메모」를 한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리 속에는 그린 것들과는 상관없는, 딴 생각 하나가 부질없이 맴을 돌고 있었다. 「이탈리아」로 갈 여비-, 그 여비가 되는 것이냐? 안 되는 것이냐?-.
동경서 여비를 의논하리라고 생각했던 어느 분을 그날 아침에 나는 만나고 왔다. 「그라비아」 인쇄기 한대를 나를 위해서 부산까지 보내주마고 하던 분-(그 인쇄기 수송에 편의를 얻으려고 그 당시 해군 참모 총장이었던 손원일씨를 만나기까지 했는데, 유태하가 국장으로 있던 어느 기관에서 서류 일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실현이 안된 채 중단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까지의 왕복 여비는 「그라비아」 인쇄기 가격에 비하면 10분의 1이 채 못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온 것인데, 막상 만나고 보니 전후에 크게 성공했다고 들었던 이 교포 사업가는 무슨 탈세 사건으로 전재산을 잃어버리고 「기소」에 있던 30만 정보나 되는 임야도 모조리 경매에 붙여졌다는 얘기다.
처자들과 같이 아파트 한 간에 사는 그 생활을 내 눈으로 보고는 더 무어라고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흥망성쇠가 아무리 삽시간이라고는 하나, 설마하니 이토록 신속 깨끗하게 그분이 몰락해 버렸을 줄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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