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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3) 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5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나 그뿐인가. 「마루보시」창고를 쓰느니, 거기는 습기로 안 되느니, 공론들로 날을 보내는 사이에, 일인들은 도리어 MP의 비호까지 받아가면서 사선으로 모조리 소장품을 일본으로 실어가 버렸다. MP와의 외교술에 있어서도 그네들이 한 수 높았다.
내 문화재회수안은 남가일몽으로 사라져 버렸으나 한가지 남은 것이 있었다. 『김소운이 일인들의 골동품을 접수해서 졸부가 됐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펴져 신표 한 장 가지고 부산을 찾아드는 불청객이 한동안 줄을 이었다.
좋은 의미로나 궂은 의미로나 「일본」은 내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일본이 무너졌으니 내가할 일이 없어졌다.
「시원섭섭」이란 문자그대로 어깨가 홀가분한 해방감에다 일종의 공허감마저 뒤따랐다. 맥이 풀린 휴직공의 기분으로 난생 처음 사생활에 눈길을 돌렸다. 종제와 같이 시작한 「레스토랑」「백랑」은 꽤나 번창했다. 아침 일찍부터는 「근로소년 조조강습회」-귀환동포자제들에게 우리 글과 말을 가르치는 일에서 「백랑」의 문이 열렸고 일요일마다 2층 「갤러리」에 모이는 「대학강좌」에는 70리 밖에서 쉬지 않고 새벽 차로 출석하는 교장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했다. 설탕 한근, 밀가루 한부대까지 미군물자요, 원조물에 의존해야만 하는 그 개운찮은 입맛-. 1년 후에 나는 「백랑」을 종제에게 떠맡기고 동래로 들어가 묘종을 가꾸고 가축들을 기르는 원예 초년생이 되었다. 그 시절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얘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앞두고 열부에서는 「인민공화국」이란 호칭이 공공연히 쓰이고 있을 무렵이다. 동래 일신여학교 뒤 언덕 위에 있는 네모난 석조 건물을 동래사람들은 「돌집」이라고 불렀다. 호주선교회가 지은 「전적산」이라는 이 돌집이 내 임시 우거였고 거기 달린 3천 평의 밭 이를테면 내 원예실습업이었다.
양실이 대여섯-. 서재며 객실 외에 아래층 식당이 40, 50명이 회식할만큼 넓었다.
청소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내 책을 읽었다는 젊은 목자들의 내방은 겸창시절부터 심심찮게 있었던터라 찾아오는 청년들은 처음에는 심상하게 대했지만, 그 젊은이들이 4, 5명씩, 6, 7명씩 몰려와서는 자리를 빌어달라고 할 때부터 나는 그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다 한잔을 나누는 내 서재 한쪽 벽에 자그마하게 「부언정담」이라고 써 붙였다.
그 부적(?)이 주효해서인지 그들은 나를 경원했고, 덕분으로 나는 내 전원생활의 정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부언정담」이란 그럴싸한 문자는 내 발명이 아니요 사실인즉 만주여행 때 어느 중국집 주인에게서 배운 「부적」이다.
『만주국이 생겼지만 당신네들 생각은 어떤가요?』-필담으로 내가 묻자. 중국집 장궤는 내 손에서 붓을 받아 쥐고 「부언정담」이라고 쓰고는 씽글 웃었다. 그 문자를 동래서 효용한 셈이다. 그 청년들의 정체는 후일 밝혀졌지만 모두 새빨간 늑대(낭)의 초년병들이었다.
길지 않은 동래생활에서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몇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내 온상 일을 도와주던 이생원은 내 분복에는 넘치는 성실 근면의 표본 같은 일꾼이었다. 그 이생원을 내게 소개해준 허모라는 경남도청의 농사과 직원도 더 바라기 어려운 중후정박한 호청년이었다.
그들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만이라도 생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 무렵 대구서 시잡지를 내고있다는 두 젊은 친구의 내방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대구로 갔다가 거기서 고 이상화의 시비 얘기가 나왔다. 약산동태에서 이루지 못한 소월시비-. 38도선이 가로막혔으니 그것은 이미 바람 수 없게 됐지만, 대구가 낳은 시인 이상화와 나는 그의 생전에 단 한번 서로 면식이 있었다.
서울로 와서 몇몇 친구들과 상의했더니 좌니 우니 해서 시끄러운 때니 만큼 내 단독으로 하는 일이라면 찬성한다는 의견들이었다. 다시 대구에 들러 거기 시인들과 또 회합을 갖고-,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한 끝에 결국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유리창도 전등도 없는 밤차로 스무 번도 더 서울∼대구를 내왕하던 일, 석재를 찾아 석공을 데리고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던 일-, 그런 것은 오히려 약과였다. 내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비 하나를 깎아 세우는 일에 그렇게도 많은 모략과 중상이 뒤따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다. 30여년이 지난 이제 와서 새삼 들먹일 일은 아니지만, 공원에 세워질 돌 한 조각에 그렇게도 배가 아프던 개벼룩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내 눈앞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제막식을 끝낸 그 날로 나는 그 지긋지긋한 대구엔 두 번 다시 들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지만, 세월이 흘러간 지금은 경부선으로 대구를 지나칠 때면 일부러 내려서 상화 시비를 찾기도 한다. 의당 대구시에 기증의 절차를 밟았어야 했는데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34년이 흘러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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