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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2) 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김해에서 가까운 어느 고을 군수가 일본의 패전방송을 듣던 자리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일본이 망하니 그렇게도 서러우냐!』고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 군수나으리의 눈물이 어떤 의미의 눈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8·15의 그 날, 산길을 내려오다가 구멍가게 앞에서 일본의 패전방송을 들은 순간 북받치는 감회를 주체할 수 없었다. 거기가 산길이 아니고 조상의 무덤 앞이었다면 목을 놓아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동리마다 마을마다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리고, 만세소리가 천지 진동하던 그 여광여취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고개를 치켜드는 하나의 회의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정녕 이 사람들이 자유를 갈구하던-, 나라 없는 슬픔에 땅을 치고 호곡하던 그 백성이었던가? 우후죽순이란 문자그대로 마구 쏟아지는 애국단체들, 애국지사들의 달뜬 그 모습-, 36년 헤어졌던 부모형제를 다시 만나면 우선 눈물부터 앞서련마는.
내가 잊지 못하는 울음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8·15를 맞아 며칠을 그냥 부산에 머물다가 재실에 있는 침구며 책들을 챙겨 오려고 활천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저면 신작로를 노인 하나가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호곡하며 오는 것이 멀리 보였다. 『징용 나갔던 아들이 죽기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인과의 거리가 차차 가까워지자, 노인의 울음석인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려왔다.
『조선아, 조선아…, 네가 어데 갔다 인자 왔노! 인자 왔노!』 36년 지난 이날까지도 나는 그 날의 그 노인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진정 자유를 갈구하던 이가 거기 있었다. 그 목멘 울음소리를 두고, 며칠 후 「부산일보」엔가에 장시 한 편을 썼던 것을 기억한다.
해방에서 채 20일도 못된 9월3일이던가-, 부산진역전의 공생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주최는 동경유학생동지회-, 회장인 이형우군(후에 국회의원)이 강연을 청해 왔을 때, 몇몇 사람이 같이하는 강연희로 알았는데, 막상 그 날이 되고 보니 나 혼자의 단독강연회라고 한다. 그 날의 청중 2천여, 연제는 『민족애의 반성』-, 후에 『겨레를 어떻게 사랑할까?』로 제목을 고쳐서 구저『건망허망』속에 그 전문이 실려 있다.
주로 사색당쟁 같은 역사의 암흑면을 지적하면서, 그 어둠 속에서도 충무공 같은 분을 하늘이 내리신 것, 사육신 같은 의로운 신하가 있음으로 해서 이 겨레의 충절과 기개를 표증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얘기에 이어 「이완용변호론」이란 대문까지 튀어나왔다.
『「역적 이완용」「매국노 이완용」해서 마치 이완용 하나만 없었다면 국태민안하고 태간성대를 누렸을 것 같이 착각하는 이가 있지만, 이완용이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재주를 가졌기로서니 어떻게 이완용 혼자서 나라를 팔아먹어 집니까? 국가의 안위보다 저 하나의 영욕에 눈이 어두웠던 파벌의 영수, 정권의 요로들이 일심합력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것입니다. 역적의 누명을 혼자 도맡아 둘러쓴 이완용을 위해서 이 사람은 오늘 보수 없는 변호인이 되려고 합니다.』
자유에 주렸던 나머지이기도 해서 두시간이 넘는 내 장광설에 청중은 열심히 귀를 기울여 준 것 같았다. 지금은 충무공을 모르는 삼척동자가 없고, 충남 아산에는 성역 현충사가 우뚝 솟아있지만, 해방 후 충무공의 위업을 공개석상에서 찬앙한 것은 이날의 내 강연이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 직후에 나는 영변의 정화여고 교사이던 김한림과 결혼했다. 하기휴가로 서울 친정에 와있던 그를 결혼 후 부산으로 데려왔다.
혼란과 희망이 뒤범벅이 된 열기의 도가니 속에서 우선 염두에 떠오른 것은 일인들이 소장한 우리 고미술의 국외유출을 막아야겠다는 그 생각이었다.
부산에 거주하던 「오오이께」, 「하자마」, 「가시이」같은 부유층 일인들은 많은 우리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어서 「가시이」 혼자만의 것으로도 소규모 박물관 하나는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친면있는 유력자 모씨를 통해 「문화재회수안」을 건준에 제의했다. 부산박물관의 건립을 전제로 한 위원회를 만들 것과 어디까지나 온당하게 교섭해서 그들이 사들인 원가의 일부라도 보상하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본시 고미술의 수집에는 단순한 이욕만이 아닌, 애호와 애정이 앞서는 것이고 보면 비록 패전국민일 망정 그 점은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제안은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좋은 생각이요. 곧 실행합시다. 하지만 보상이니 교섭이니 그런 건 필요 없어요. MP를 앞장 세워서 「트럭」으로 한바퀴 돌면 만사 해결입니다.』
모르는 말이다. 일인들은 수집품을 갖가지 방식으로 분산시켜 한자리에 모아두지는 않는다. 소재를 모르고서야 MP인들 어찌하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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