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적 타서에 집착말고 소재의 다양성 모색토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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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초심자들 뿐 아니라 시조를 많이 써온 기성시인들의 작품들에서도 시조는 한국적 토속의 정서만을 노래하는 것으로 한정해 놓고 쓰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시조라고 해서 누재를 좁히거나 자유시가 구사할 수 있는 것을 다해낼 수 없다는 고정관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어차피 언어의 절제를 얻어야 하고 외형이든 내재든 운율을 밟아야 한다. 그런 언어의 압축과 운율의 기용을 우리의 전통 시형식인 시조에 적용시키면 되는 것이다.
시조의 운율만 터득하면 자유시가 수용하는 어떤 소재든 시조로서의 소화가 가능하다. 3장 단수로 국한한다면 어렵겠지만 연작으로 쓸수 있는 한 굳이 시조를 버릴 이유가 없다.
따라서 형식에서 시조를 선택했더라도 소재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것이 시조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산촌에 오는 봄』은 나무랄데 없이 여문 작품이다. 한자의 파격도 없으면서 봄이 오는 한국의 산촌을 이만큼 묘사해내는 솜씨는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단연코 이 주일의 장원작이다.
『탈놀음』 또한 한국적 전통의 소재로 시조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소재를 자유시로 썼으면 이만큼의 효과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회><봉산탈춤> 등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는 한의 몸짓을 <품어도 꽃으로 되는 불탑속의 천둥소리>로 듣기까지 지은 이의 귀가 얼마나 크게 열려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허수아비의 노래』는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내면의 의지를 표출시키고 있다. 현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개척의 의지를 <소망은 어른 거리며 피어나는 황금물결>에 담고 있다.
『길』은 인간 <삶>의 진행을 길에 비유하여 시를 얻고 있다. <밤을 앓는 낮달><불타는 날개를 달고> 같은 표현으로 종장율을 마무르는데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시의 전체적인 조화에서 진부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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