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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공정위원장이 10억 헌금 강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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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남기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SK그룹에 특정 사찰을 지정해 10억원을 기부토록 요구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제3자 뇌물수수 혐의다. SK그룹 간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기부를 요구한 뒤 한달 후 독촉까지 해 입금토록 시켰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李씨 본인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직무와 무관하게 단순히 사찰의 불사(佛事)에 기부를 부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금품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공정위원장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돈을 기업이 선뜻 기부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흔히 공정위를 '경제 검찰'이라고 부른다. 기업 행위의 공정거래 여부를 감시.심판하고 고발 등 처벌기능까지 막강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기관, 어떤 공직자보다 비리와는 거리가 멀어야 할 조직이다.

공정위의 총수가 퇴직하자마자 부정부패 혐의로 검찰에 불려다니는 모습은 개인적 불명예를 넘어 조직 전체의 신뢰를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정거래위원장이 기업에 금품 기부를 요구한 행위 자체가 우선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명목으로도 해명이나 정당화가 안된다. 이 같은 한심한 인식을 가지고 어떻게 국가 요직을 맡을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 사건은 의문 투성이다. 10억원은 공직자가 종교단체에 기부한 금액으로는 상식을 넘어선 많은 액수다. 기부금이 전액 본래 목적대로 사용됐는지도 궁금하다. 사회단체 헌금을 빙자한 뇌물수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SK그룹 계열사와 연관된 기업결합 심사나 합병 등의 업무를 처리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대가성도 의심할 수 있다. 또 업무적으로 대기업 전체를 상대해온 李씨가 이같은 요구를 과연 SK그룹에만 했을까도 조사해야 한다.

李씨의 영장 범죄사실은 우리나라 공직자의 윤리수준을 말해준다. 그렇게 부정부패 척결을 수십년 외쳐왔으나 현실은 이 정도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공직자 부정부패 근절은 더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특별 대책이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