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맥 끊겨서야…"무형문화재「진주검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진주=한천수·김택현 기자】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검무)의 기능보유자 김수악씨(56·여)가 당국의 무관심과 주민들의 외면으로 갈곳마저 잃은 채 온돌도 없는 썰렁한 진주시문화관 숙직실 방 한 칸을 빌어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워와 싸워야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다.
김씨는 어려움 속에서도 무형 문화재 기능 전수를 위해 민속예술학원까지 차렸으나 주민들의 관심부족으로 10여명만이 모였을 뿐이어서 그나마 학원도 지탱 못 한 채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무형문화재가 자칫 사라질 위험마저 있는 것이다.
검무는 신라시대 화랑관창이 16세의 나이로 백제와 싸우다 포로가 돼 참수 당하자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칼춤을 추는 일종의 굿거리. 8명이 한 조가 되며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러와 팔검무 또는 진주검무라고 일컬어왔다.
67년1월 진주검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김씨를 비롯한. 8명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됐으나 5명은 이미 숨졌고 김씨 이외 2명도 당국의 뒷받침이 없어 후계자 양성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70년 초 김수악씨는 민족의 얼이 담진 무형문화재 보존을 위해 진주시 수창동에 사설민속예술학원을 건립했었다.
처음에는 초·중·고등학생과 주부들 사이에 인기를 모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으며 전수자들도 차차 늘기 시작했었다.
진주시는 검무를 보다 대중화하기 위해 77년 8월 현재의 진주시 문화관 안에 시립국악원을 설립, 김씨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자신이 경영하던 학원을 문닫고 시립국악원 육성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당시 김씨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지급하는 월 7만원의 생활보조금과 시로부터 매달 8만∼9만원씩의 강사료를 받아 남편 이강진씨와 함께 별 걱정 없이 기능전수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국악원도 원생이 68명에 이르는 등 그런대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79년 6월 진주시는 남성동 성내복원사업으로 이곳 일대의 5백여 가구를 이주시키느라 막대한 재정부담을 안게 되자 시립국악원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또 시는 시립국악원이 남성동 주택철거 지역 안에 있으므로 가무음곡이 주민들을 자극시킬 우려가 있다고 검무지도를 못하게 했다. 김씨는 국악원이 문을 닫아 강사료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래도 기능전수만은 그만둘 수 없어 지난해 6월 강남동에 민속예술학원을 다시 차렸으나 10여명밖에 모이지 않아 이들이 내는 수강료 10여만원으로는 학원임대료·전화·전기요금 등도 낼 수 없어 남편 이씨와 함께 시 문화관 숙직실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3평 크기의 「콘크리트」방바닥에 전기장판을 깔고 부부가 새우잠을 자는 것은 물론 부엌이 없어 문화관 창고에서 석유 곤로로 밥을 지어먹는 김씨는 『요즘은 문화재 관리국에서 지급하는 월 10만원의 생활보조금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며 『당국의 무성의와 관심부족으로 기능전수가 거의 어렵게됐다』고 보다 적극적인 당국의 대책을 바랐다.
경남 거창이 고향으로 7세 때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 김씨는 11세 때 진주 권번에 들어가 권번장 전두옥씨 밑에서 굿거리·살풀이·판소리와 함께 진주검무를 익힐 때 재능을 인정받아 합천 해인사, 하동 쌍계사, 경주 불국사 등 명산대찰을 옮겨다니며 유성준 선생에게서 당대의 명창 임방울씨·신숙희씨 등과 함께 검무·굿거리·판소리 등을 전수 받았다.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 훌륭한 후계자를 길러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김씨는 『당국과 주민들의 무관심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