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250> 병영 내 사건·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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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장혁진 기자

“자네는 이곳을 몰라. 진실을 감춰야 평화가 유지되는 곳…” 2000년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군 의문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김훈 중위사건이 영화의 배경이지요. 지난 6월 발생한 ‘22사단 임모(22) 병장 총기난사 사건’에 이어 28사단 윤모(20)일병 사건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지만,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의혹투성이입니다. 건군 이래 이어져 온 군 관련 사건사고를 정리했습니다.

장혁진 기자

■ 가장 불행한 연애편지, 최영오 일병 사건

 “우리가 만나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맑게 갰습니다” 서울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 재학 중 입대한 최 일병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연서(戀書)에 이렇게 적었다. 편지의 답장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1962년 7월 8일 오전. 육군 모부대 내무반에 최 일병의 애인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짓궂은 고참들은 12통의 편지를 최 일병의 허락도 없이 뜯어보고 놀려댔다. 최 일병은 선임병들에게 항의하고 소원수리를 통해 사과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건 주먹과 발길질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최 일병은 고참들을 향해 자신의 M1 소총을 난사했다.

 이 사고로 2명이 숨졌다. 당대 최고 엘리트인 서울대생이 저지른 사건인데다 연애편지가 상관 살해의 계기가 된 점이 주목을 끌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서울대 학우들과 각계 각층 인사들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군사법원은 최 일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최 일병은 판결 3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처형 직전 최 일병은 “나의 죽음으로 우리나라 군대가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 날 시신인수통지서를 받아든 최 일병의 어머니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한강에 몸을 던져 아들의 뒤를 따랐다. 군대 내에서 개인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히던 시절 벌어진 비극이었다.

■“데모했다고 괴롭혀 월북” 조준희 일병 사건

 1984년 6월 26일 오전 10시. 강원도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22사단 56연대 4대대 TOC상황실로 난데없는 수류탄 폭음과 함께 다급한 보고가 들려왔다. “북, 북한의 기습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522GP(Guard Post·전초)로부터 전해진 무전이었다. 후방 부대가 긴급히 출동하고 전시(戰時)를 방불케하는 상황이 이어졌지만 이는 4대대 소속이었던 조준희 일병이 동료 전우들을 대상으로 벌인 참극이었다.

 조 일병은 내무반에 수류탄 3개를 터뜨리고 M16 소총을 발사했다. 동료장병 1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다. 중상을 입고 내무반에서 기어나오는 동료들을 향해 조 일병이 한발 한발 조준사격까지 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은 더했다. 조 일병은 곧바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를 쫓던 수색 대원들이 발목 지뢰를 밟거나 오인사격으로 추가로 사망했다. 조 일병의 월북으로 범행 동기 등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있다. 사건 발생 다음 날 북한이 대남방송에 조 일병의 목소리를 내보내면서 월북 사실은 공식 확인됐다. 조 일병은 방송에서 “충남대 재학시절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남조선 고참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받아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김훈 중위 사건.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이듬 해 재조사에 나서 자살로 발표했으나 2009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회는 자살로 단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사진은 재조사 당시 재연 모습.

■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 김훈 중위 사건

 “탕!”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한 지하벙커에서 의문의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총소리가 난 현장에서 당시 경비소대장이던 김훈 중위(당시 25세, 육사52기)가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은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김 중위의 오른발 옆에는 베레타 권총이 놓여 있었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70·예비역 중장)씨는 아들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김 중위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망 전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근거였다. 오른손잡이인 김 중위의 왼손바닥에서 화약흔이 발견된 점도 의문이었다. 아버지의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군은 김 중위가 권총 자살한 것으로 최종 결론 내렸다. 하지만 최초 현장감식이 있기 전 군은 이미 김 중위의 사망을 자살로 잠정 결론내리고, 미군은 사건 당일 저녁 청소를 하는 등 현장을 훼손한 것으로 알려져 군의 성급한 부실수사가 도마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9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김훈 중위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총기격발실험을 통해 자살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며 김훈 중위사건은 군의 대표적 의문사로 남았다. 2012년 8월 국민권익위원회는 육군본부에 김 중위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 병영악습의 민낯, 김동민 일병 사건

2005년 6월 28사단 GP 총기 난사 사건의 피의자 김동민 일병이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받은 뒤 수사관·헌병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이 사건은 군 내 만연해 있던 구타와 악습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2005년 6월 19일 오전 2시 30분. 경기도 연천군 중면에 있는 28보병사단 GP에서 김동민 일병(당시 20세)이 GP안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K-1 소총으로 소대원들을 향해 44발을 난사했다. GP장 김종명 중위 등 장병 8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은 ‘김 일병 사건’이다. 군 당국의 조사 결과 김 일병은 평소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과 욕설 등 인격모욕을 당한 데 대해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고로 육군 내 만연했던 구타 등 ‘병영 악습’의 민낯이 드러났다. 내성적 성격의 김 일병은 사건 당일 선임병으로부터 당한 언어폭력이 직접적인 범행동기였다고 진술했다. 조사과정에서 김 일병은 “또 다른 2명도 죽였어야 하는데 못 죽였다”고 말해 군 내 왕따문제의 심각함을 보여줬다. 국회 진상규명소위원회는 GP근무 병력의 지원병 충당과 특별휴가 제공 등 다양한 병영문화개선책을 내놨다. 사병 봉급 대폭 인상, 사병관리 시스템 개선도 포함됐다. 일부 군 관계자들은 김 일병 사건 이후 단행된 조치들이 군내 가혹행위를 상당 부분 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단장과 사단장 등 최고 지휘관들에게 감봉 3개월의 경징계만 내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 ‘기수열외’가 부른 참극, 김민찬 상병 사건

2011년 7월 해병대 2사단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현장 검증이 진행됐다. 당시 총기를 난사했던 김민찬 상병이 모자를 눌러쓴 채 휠체어에 앉아있다. 이 사건으로 해병대의 ‘기수열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천시 강화군에 위치한 해병대 2사단 소속 김민찬 상병(당시 20세)은 동료들이 미웠다. 평소 부대 내에서 ‘고문관’으로 찍혀 선·후임병들로부터 조직적인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1년 7월 4일 오전. 부대 내 창고에서 몰래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김 상병은 상황실 총기보관함에서 K-2 소총을 빼냈다. 탄약고로 이동해 실탄 75발과 수류탄 1발도 함께 챙겼다. 전화부스 옆에 있는 이모 상병을 향해 처음 방아쇠를 당긴 것을 시작으로 생활관 내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동료병사에게도 총을 쐈다. 총기를 난사한 김 상병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을 기도했지만 가벼운 화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4명이 죽고 2명이 다친 ‘해병대 2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전말이다. 김 상병과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준혁 이병도 살인 모의에 가담했다는 점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후임병에게도 무시와 괴롭힘을 당하는 군 내부 따돌림 문화 ‘기수열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병대의 허술한 총기관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당시 상황부사관이 자리를 비웠고, 잠겨 있어야 할 총기 보관함은 개방돼 있었다. 해병대는 가혹행위에 가담한 해병에 대해 빨간 명찰을 떼어내고 다른 부대에 전출시키는 ‘병영문화혁신 100일 작전’ 등 뒤늦은 대책을 내놨다.

■ 군 형법은 일반 형법보다 형량 높아

 의도적으로 아군을 살해한 군인은 군 형법 적용을 받으며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다. 엄격한 기강이 생명인 군 특성상 일반 형법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군 형법 제53조와 59조는 각각 상관과 초병을 살해한 사람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조항에 따라 앞서 소개된 사건의 주범들도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 일병 사건’을 일으킨 김동민 일병은 2008년 사형을 선고받고 현재 육군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해병대 총기사건’의 주범 김민찬 상병도 2012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 상병의 범행을 도운 정 이병은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22사단 총기사건의 용의자 임 병장도 사형 판결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1997년 이후 사형이 실제로 집행되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 사정에선 사실상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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