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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정들자 떠나는 『시한부교단』-산휴 강사 박중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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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중서씨(48·서울 성북구 정릉3동 692의26)의 겨울은 유달리 길고 유달리 춥다.
봄이 오기를 누구보다도 기다렸고 누구보다도 개학이 되기를 고대한 사람들. 박씨는 그런 출산 휴가 중 대치강사다.
여교사가 출산을 하기 위해 쉬는 법정 유급휴가 기간인 한달동안 그 여교사 대신 그 학급을 맡아 수업을 해주는 직업.
엄밀히 따진다면 방학동안에는 「무직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이 교육자가 아니라는 묘한 괴로움까지 느껴야 한다.
그러나 방학기간을 벗어났다 해도 출산을 하는 여교사가 있어줘야 산휴 강사에게는 「1개월 취업」이 가능하다.
이번 달은 이 학교 1학년, 다음달은 저 학교 3학년 식으로 매달 후조처럼 출산교사의 학급을 찾아 학교를 옮겨 다녀야하고 한달 후에는 어김없이 「마지막수업」을 해야하는 직업.
산휴 강사들이 걷는 「뒤안」은 고달프다. 대부분의 산휴 강사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다른 길을 택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박중서씨는 경력이 2년도 안되지만 산휴 강사로는 고참에 속한다.
산휴 강사는 출신별로 볼 때 크게 두 갈래 유형으로 구분된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뒤 정식발령을 기다리는 사람이거나 재직 중 특별한 사정으로 교직을 떠난 퇴직교사. 박씨는 후자에 속한다.
78년4월까지만 해도 박씨는 경력 15년의 당당한 「정식교사」였다.
묵호 영월 등 강원도 일원과 경기도 포천 용인 등으로 전근을 하면서 15년 동안 정든 교단이었으나 77년의 정기 건강진단 때 「악성당뇨」라는 판정을 받으면서 박씨에게 퇴직이 마련됐다.
처음에는 6개월간의 휴직원을 내고 요양한 뒤 78년3월 복직을 했으나 한달 만에 병세가 악화돼 의사의 권고에 따라 끝내 사표를 내고 만 것.
1년쯤 요양치료를 하고 나니 병세는 많이 호전됐으나 이번에는 아내와 어린 3남매 등 5식구의 생계가 어려워졌다.
『물론 생계를 꾸려야하는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으나 교단에 대한 미련도 버릴 수가 없었읍니다.』
그렇게 택한게 산휴 강사. 79년6월 서울 M국민학교에서 산휴 강사로서의 첫 수업을 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임시 선생님』이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울컥해지기도 했으나 『다시 대하는 어린이들과 다시 만져보는 분필이 반갑고 고마왔다』고 박씨는 그 첫 수업을 회고한다.
일직과 숙직이 없는 것을 빼고는 산휴 강사의 업무는 학급 담임교사의 업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수업·학급사무·교실관리·아동관리 등.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1개월 무사고 담임」을 해내야 다음달 또 다른 「취업」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중압감이 더하다.
수업시간에 참지 못하고 그냥 「쉬야」를 해버리는 녀석들의 옷을 말려주기도 해야 하고 장난치다 팔이 부러진 개구쟁이를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기도 해야한다.
지난해 2월 C국민학교 때. 박씨가 맡고 있던 학급의 한 어린이가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놀다 어디서 날아온 지도 모르는 돌멩이에 눈을 맞고 끝내 실명했다.
그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산휴 강사인 자신이 학급을 맡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죄스러움에 식욕도 잃고 한숨과 걱정으로 새웠던 고통의 밤들.
수업 자체에도 문제는 있다. 박씨의 경우 「오기」로 덤벼 한달동안 학급전체의 성적을 전보다 훨씬 올려놓은 적도 있지만, 우선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이나 모두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이 이뤄 질 수밖에 없다. 반장 이름도 모르고 수업을 시작했다가 점차 서로 낯이 익으며 친밀해질 무렵이면 어느새 마지막 수업.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법 시행령에는 「증치교사」를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는 하다.
교사의 유고에 대비해 학교의 규모에 따라 일정수의 고정 유급교사를 항상 배치해 둔다는 것.
그러나 예산문제 때문에 아직 시행은 엄두도 못 낸다.
「1개월 전담」의 박씨에게 딱 한번 예외가 있었다. K국민학교 때.
한 학급을 『자그마치 두 달 동안이나』맡은 적이 있다. 담임 여교사가 출산 일을 잘못 계산한 것. 그 두달 동안은 산휴 강사 박씨에게 가장 훈훈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한달쯤 어린이들을 파악하고 나니 『정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고 박씨는 말한다.
키 작은 녀석을 들어 안아 올리면서 아침인사를 하고 자기 손수건으로 녀석의 코를 풀어주고 산수가 서툰 어린이에게는 방과후 개별지도에 별도의 숙제를 내주고….
『정식교사였을 때도 그처럼 뜨겁게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렇게 정을 쏟았던 만큼 「마지막 수업」도 그만큼 가슴이 아팠다.
『선생님, 계속해서 가르쳐 주셔요.』 한 녀석이 말하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고 반장녀석이 머뭇머뭇 걸어나와 잘 포장한 손수건 한 장을 교탁에 놓았다.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하늘에다 대고 『뭣인가』외치고 싶었다고 박씨는 그 「마지막 수업」을 떠올린다. 지난 연말에는 그 학급 어린이들이 띄운 예쁜「카드」가 16장이나 박씨 집으로 날아들었다.
박씨가 받는 강사료는 월9만6천2백원. 규정대로 라면 산휴 강사에게는 과거의 경력과 호봉을 따져 급료를 줘야하고 그럴 경우 8호봉인 박씨는 21만9천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예산사정을 이유로 산휴 강사들에게 임시강사의 급료를 주고있다(임시강사의 급료는 일률적으로 월 9만6천2백원).
이 돈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가 없다. 박씨가 산휴 강사를 시작했을 무렵 아내가 전자제품 행상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박씨보다 훨씬 더 번다.
매달 말께 면 박씨는 초조하게 한 장의 엽서를 기다린다. 『다음달은 ××학교로 가라』는 교육구청의 배정서. 그 한 장의 엽서가 박씨에게는 생활인으로서 또 교육자로서의 긍지를 연결 시켜주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산후강사는 60여명. 출산 여교사가 60여명은 돼야 산휴 강사전원의 「1개월 취업」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이번 달에는 출산교사가 60여명이 못되는지 박씨는 「한 장의 엽서」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개학과 함께 학교근처를 쏘다닌다.
『다시 태어나도 교사를, 정식교사를 하리라』면서…. <오홍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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