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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출판] '예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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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예언자/칼릴 지브란 지음, 미셸 페리 그림/오강남 옮김, 현암사, 9천원

'예언자'가 또 번역됐다. '또'란 말이 붙는 까닭은 이 책의 번역본이 이미 20여종에 달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함석헌 선생부터 시작해 시인 강은교.류시화씨 등의 번역도 나왔다.

아일랜드 시인 조지 러셀이 꼽듯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기탄질리'와 함께 동양 최고의 걸작이라는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오한 상징성 때문에 읽는 이, 번역하는 이에 따라 그 해석의 맛이 달라지는 탓도 컸다.

이번에는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 교수로 있는 신학자 오강남씨가 번역했지만, 이 책을 보고 '중복 출판'이라고 지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3년 전 저서 '예수는 없다'(현암사)를 통해 외눈박이 한국 기독교의 폐해를 지적했던 그였다. 표현은 어렵지 않되 행간을 곱씹게 하는 그의 문장력이 빚어낸 '예언자'는 어떤 맛일까.

오강남씨 번역은 앞선 것들과 달리 경어체로 일관한다. 책 속의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을 그대로 대신 전하는 자가 아닌데 "사랑이 너희에게 손짓하거든 그를 따르라"는 식으로 반말을 했을 까닭은 없으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문장이 "사랑이 여러분을 손짓해 부르거든 그를 따르십시오. 비록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를지라도"다. 훨씬 부드럽다. 책 첫머리 '배가 오다'라는 장에 나오는 "Prophet of GOD, in quest of the uttermost"라는 구절도 이전 번역과 다르다.

번역자에 따라 "극단의 대답을 찾는 분이여" "모든 것의 끝을 추구하는 자여" "최상을 추구하시는"으로 번역했는데, 그는 "지극한 이를 찾아"라고 평이하게 썼다.

예언자를 절대적인 것을 추구한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은 원문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신학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 아닐까.

서문에 밝힌 '예언자'의 대략 내용과 칼릴 지브란의 개인사에 대한 설명도 책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예언자'의 내용은 이렇다. '선택받은 자'란 뜻의 이름을 가진 알무스타파는 오팔리즈성에 나그네로 들어와 12년을 산다.

어느날 성 밖 언덕에 올랐다가 안개 속에서 자기를 고향 섬으로 데리고 갈 배를 보게 된다. 기쁘기도 했지만 그동안 살던 도성을 떠난다는 것도 슬펐다. 사람들은 떠나는 그를 말렸다.

그때 여자 예언자 알미트라가 나타나 알무스타파에게 떠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으나 삶과 죽음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남기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알무스타파는 사랑.결혼.자녀.일 등 일상 생활과 선.악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남기는 말들에는 삶의 정수가 녹아 들어가 구구절절 가슴을 울린다.

실제로 1883년 레바논에서 태어난 지브란은 미국으로 이민와 보스턴에서 교육받았다. 불행한 가족사가 있었으나 부유한 미국 여인 메리 해스켈의 후원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언자' 속 오팔리즈는 지브란이 12년 동안 살았던 뉴욕이고, 여자 예언자는 해스켈, 돌아갈 고향섬은 레바논이라는 해석이 있다.

근원적으로 오팔리즈는 이 세상, 고향섬은 인간이 돌아가야할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예언자'의 새 번역은 훨씬 읽기 쉽고, 친근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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