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4)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21)|<제자=필자>김소운|「웰치 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구상이 동경서 보내온 제문은 정중하고도 간곡했다.
『선생님은 아마 한국역사상, 아니 금세기 전 세계에서도 희귀하고 독창적인 존재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국의 김시습, 불운의 김립, 「코미디언」김선달들과도 유가 같지 않으며 원효나 서산과 같은 고덕명승과도 또 격을 달리하십니다. 예를 들면 8·15가 되니까 삼천만이 하나같이(물론 승려들까지도) 경세가가 되는데, 오직 선생님 홀로만이 그날부터 이제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를 빡빡 깎고 자기의 출가를 재확인하셨다는 당신의 그 크신 근기를 어찌 일화로만 흘려 넘기오리까. 당신의 존재는 철학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사상이 공백이었던 금세기를 홀로 가늠하셨다고 단언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대독을 하면서도 나는 구상의 극진을 다한 제문의 글귀와는 다른 또 하나 제문을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따끈한 국으로 저녁한끼 대접하고 싶었는데요…. 못뵌 10년 동안 이야기도 많구요. 주무실 구들목하나 시중들 사모님 한분 찾아드린다고 해놓고 모두 부도만 내버렸습니다. 선생님 거기는 추위도 주림도 없지요? 담배를 있는 가지 수대로 여기 불을 당겨 놓았습니다. 제찬도 못다 잡수실만큼 놓았습니다.
선생님, 호강하시네요. 구상이 이런 극성맞은 제문을 써서 보내왔습니다. 그 제문을 이렇게 한복차림으로 제가 읽고 있습니다. 우습지요. 이게 모두 살아 있는 놈들의 각색이요, 연출입니다. 연출이 좀 서툴러도 허물치 마십시오. 거기서 보시는 인간세상이 가소로와도 웃지는 마십시오. 유명은 달라도 오늘은 선생님 역시 이 무대의 주역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는, 『선생님! 오래잖아 저도 그리로 갑니다.』
40년의 세월을 누비면서 공초선생의 회상을 이것저것 추려보았다. 그밖에도 유명했던 공초선생의 담배 물찌를 두고는 흥겨운 일화 하나를 『애연산필』(69년)이란 글 속에 적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간동에 공초선생을 찾아간 것은 서울은 첫날이었지만 그런지 2. 3일 후에 범부 김정설, 포석 조명희, 수주 변영노씨 등 여러 선배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수주 한 분만은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고 포석댁에서 얼굴을 알게된 것으로 기억한다.
숙소는 동자동일 그당시 삼판통이라고 부르던 남산기슭이다. 거기 일문지 매일신문 경성지사의 기자인 김학수씨가 살았다. 그 댁을 부산 외가댁에서 소개해주었다. 나는 그 김씨댁에 하숙을 하면서 역시 김씨의 주선으로 「대이쯔으」라고 부르던 제국통신 경성지사의 견습기자로 들어갔다(그당시 유일한 통신사이던 제국통신이 30여년간에 「전보통신」「연합통신」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의 「공동통신」이 되었다).
동경본사에서 하루 네번 들어오는 전문을 원고로 고쳐서 그것을 등사판 원지에다 옮겨 쓰는 것-그것이 견습기자의 소임이다. 오전·오후 두 차례 취인소(증권거래소)에다 전화를 걸어 증권시세를 받아쓰는 것도 맡은 일의 하나인데 「가네보오」가 얼마, 「도오시바」가 얼마하고 주문처럼 연달아 외는데는 알아들을 재간이 없어 진땀을 뺐다.
감리교 동양 총감독이던 「웰치」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가서 제나라 신문기자들에게 『조선인은 일본통치에 열복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파란을 일으켜 국내의 기독교도들이 교파를 떠나서 모조리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웰치 사건」이다.
제국통신에는 조선인 기자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인력거를 타고 사건 속에 뛰어들어갔다. 청년회관(YMCA)으로, 기독신보사로, 몇몇 목사댁으로-. 그날 만난 기독신보의 주필이란 분이 한쪽 팔에 기다랗게 붕대를 감고 있었던 것이 인상에 남아있다.
돌아와서 이 역시 난생 처음으로 기사라는 것을 썼다. 그 기사는 다음날 거의 수정 없이 서울·부산·대구를 위시한 국내의 일문신문 조간에 「톱」기사로 커다랗게 실렸다. 다음날 내 직명에서 견습이란 두 글자가 없어지고, 월급도 30원에서 60원으로 일약했다.
그 뒤 어느 숙직날 밤, 지사의 사내일지란 것을 들쳐 봤더니 지사장이 「웰치 사건」에 대한 내 취재며 기사원고를 극구 찬양한 글에 연해서 「군의 전도는 가해 기대함직 하다」고 쓰여 있었다.
월급은 갑절이 오르고 지사장은 크게 기대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직업이 뭔지 구미에 맞지 않았다. 나이를 다섯살이나 더 붙여 23세로 썼으나 아직도 배꼽이 떨어지지 않은 푼수에 경찰서니 부청(지금의 시청)이니를 나이 든 선배기자들을 따라다니는 것이 기분에 거슬리고 거북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