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의 비행-강능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민기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당장 소개시켜 주지. 지금쯤 천사님이 문밖에 와 계실 거야. 내 얘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해서 막 잠을 청하려다가 부리나케 옷을 입으시고 이리로 달려왔을 거란 말이야.
(조민기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사뿐 걸어가서 문을 연다. 두 사람 다 약간씩 취기가 오른 듯 하다. 그들은 유쾌한 부랑자들처럼 서로를 희롱하는데, 그것이 묘하게 아름다운 분위기의 정서를 자아내게 만든다. 실제로 보이지 앉으나 조민기는 마치 천사가 있는 것처럼「마임」으로 여러 가지를 표현해 준다)
들어오시죠. (절을 한다)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탁자 쪽으로 데리고 온다) 저기 내 친구가 천사님을 꼭 한번 만나 뵙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리로 좀 앉으십시오. (의자를 내준다) 자네, 천사님에게 인사 드리지.(한수는 어쩔줄 몰라 머뭇거린다) 자넨 이 은빛 날개를 달고 오신 천사님이 안 보이나? 천사님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시고 자상하시지. 자네도 인사를 드리고 소원을 말하면 금방 들어 주실거야.
김한수 저…처음 뵙겠습니다. 김한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제 소원은….
조민기 이 사람아, 소원은 천사님이 숨을 좀 돌리신 다음에 천천히 말해도 돼. 모든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급하게 굴어선 안돼. 하늘 나라의 속담에는「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어라」라는 말이 있어. 왜냐하면 너무 발리 모든 일을 해치워 버리면 그 기나긴 영겁의 시간을 소비할 수가 없어서 괴로움에 시달릴 것 같으니까. 그리고 말투도 세련되고 고상한 말만 꼴라 써야 돼. (천사에게) 당신이 숨을 찰적마다 당신의 그 보드라운 솜털 가슴에서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내게 뭐라고 작게 속삭이는군요. 난 그 말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김한수 뭐라고 속삭이는데?
조민기 늦어서 미안하다고. (천사에게)전 요번에 오실 때 에덴 동산에서 사과를 많이 따 가지고 오실 줄 알았는데 그냥 빈손으로 오셨군요. 하지만 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일은 내일로 미루셨을 거라구요. 전 당신을 너무나 그리워하기 때문에 밤마다 당신 꿈을 꾼답니다. 하늘 나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하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지요. 그리고 저 뒤에서는 옥구슬 굴려 가는 소리가 은은히 밀러와 하프소리와 어우러져 하늘나라의 모든 소리를 대신하고 있지요. 당신과 나는 수정처럼 맑은 창공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춤추며 노래하지요. 가끔씩 새털 구름사이로 세상사람들의 저속하고 비열한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면 저들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당신과 저는 황혼 녘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지요. 황혼은 밤 시간 내내 계속되어 우리들의 기도를 인자하게 바라보지요. 어때요? 제 꿈이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김한수 천사님, 이제 숨을 돌리셨으면 제 소원을 좀 들어주십시오. 저의 하숙집 아주머니는 너무나 표독스러워서 제가 조금만 늦게 집에 들어가면 밥도 안 주고 매몰찬 시선을 던지며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답니다.
『오늘은 모처럼 고기를 좀 장만했었었는데 당신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두 먹어치웠어요』라고 쏘아붙이지요. 그리고 어쩌다 제가 좀 일찍 들어가면 그 표독스런 아줌마는『당신은 학교와 집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니 측은해서 볼 수가 없군요』라고 하면서 능글맞게 혀를 끌끌 차지요. 이는 분명 악의에 가득 찬 저주스런 폭언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이 표독스런 아줌마를 혼내줄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조민기 있지! 그 집을 나와서 다른 집을 구하면 되지.
김한수(화가 나서) 그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쓰려니까 문제가 있지 않느냐 말이야!
조민기 화내지 말게. 천사님은 지금 몹시 피곤하실 거야. 내가 노래를 불러드려야겠어. 천사님, 제 노래를 들으시고(김한수롤 가리키며) 이런 세속인들의 고통을 걱정하시는 시름을 잊으십시오. (김한수에게) 역사의 강물 위에 강제로 배 띄워진 긴장과 시간 가운데 잠깐의 휴식, 우리들의 공포를 잠깐만 미루어 주세요.
(조민기는 꿈을 꾸듯 노래를 부른다. 절대로 저속하게 보여서는 안 되며 적어도 음정과 박자는 정확해야 한다)
저기저기 아무도 모르는
궁궐에 사는 왕자가
어느 날
요술 담요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요술 담요가 뒤집혔네
왕자의 몸에는 날개가 없었네
땅으로 땅으로 바람을 가르며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소리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빙글빙글 돌아라
한 바퀴 또 한 바퀴
왕자들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네.
(천사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반쯤 무릎을 꿇고) 천사님의 하해 같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렇게….
김한수 이봐! 천사님은 가셨어.
조민기 가셨다구?
김한수 그래, 자네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살금살금 가셨다구.
조민기 (천사가 앉았던 의자를 손으로 더듬어 본다) 정말 가셨군. 자네, 천사님이 나가시는걸 봤나?
김한수 내게 조용히 하라면서 나가시더군.
조민기 왜 옷을 감추지 않았어?
김한수 옷이 보여야 감추지.
조민기(묵묵히 서 있다가) 그렇지. 볼 수가 없지. 치맛자락이 스친 발자국도 볼 수가 없고 문 여닫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어. (사이)
도대체 여기에 이렇게 가두어 놓고 어쩌자는 걸까? 천사님은 나에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어. 그래서 난이 방을 선택했지. 그런데 그 다음은 뭐야? 난 이 방에서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지 않나? 안 그래?
김한수(의아해 하며)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야?
조민기 무한히 샘솟을 것 같은 생명, 그것이 유한하다고 누구나 밝히기를 거부하는 생명의식, 난 겨우 이런 따위나 자각한 채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구. 이곳은 나에게 안정을 갖다줄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 내가 깨달은 것은 움직여야 된다는 것 뿐이야.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난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해서 그 공허함을 보상받으려 했어. 그런데 이것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라면 그 질식할 것 같은 공간은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사이)
난 얼마 전에 불쾌한 냄새를 피하여 이곳에 왔을 때, 물밀듯이 밀려오는 권태를 잊기 위해서 예리한 칼을 여기저기 던지고, 잉크병을 여기저기 던지는 일과를 시작했어. 검은 새와 검은 태양, 검은 태양과 검은 새, 그 위에 내리꽂히는 칼, 도피는 권태를 낳고, 권태는 행위를 낳고, 행위는 허무를 낳고, 허무는 극복을 낳고, 극복은 쾌락을 낳고, 쾌락은 죽음을 낳고, 죽음은….
아무 것도 잉태하지 않아. 왜냐하면 죽음은 오랜 기간이 아니라 쾌락 다음에 오는 어떤 순간일 뿐이니까.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