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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유주현씨 부인 조점봉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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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간·현실·역사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구성력이 강한 알찬 문장의 단편과 역사소설 등으로 특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한국 문단의 거목 유주현씨(60).
그에게는 가난했던 습작시대를 거쳐 활발했던 작품 활동기, 그리고 척추질환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까지 이르렀던 지난 2년여의 투병생활을 딛고 일어난 오늘에 이르도록 그의 곁을 지켜온 조용한 내조자 조점봉 여사(56)가 있다.
서대문 영천을 지나 무악재를 넘으면 오른 쪽에 솟아오른 안산 마루. 그 가파른 언덕 위에 작가 유주현씨의 2층 자택이 자리하고있다.『바깥양반은 글만 쓰시고 저 역시 주변이 없어서 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교육시키는 동안 고생 참 많이 했어요.
해방직후 첫 아이를 낳고는 이틀 사흘씩 때를 끓이지 못하는 곤경을 치르기도 했어요. 걱정을 좀 놓는가 싶으니 덜컥 바깥양반이 병석에 눕게 되셔서….어서 기운을 되찾아 그동안 못하신 해외여행도 하시고 다시 글도 쓰시기만을 바랍니다.』
지난2년간 몇 차례씩 입·퇴원을 반복하고 때로는 생명이 위험했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부군의 병간호에 쫓기고 마음을 쓰느라 갑자기 늘어난 흰 머리칼과 이마의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깊은 쌍꺼풀이 진 큰 눈은 맑고 선하기만 하다.
이들 부부가 결혼한 것은 해방전 해인 44년, 조 여사의 친척 어른의 중매를 통해서였다. 당시 유씨는 일본에서 돌아와(조도전대 유학) 징용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위해면의 창동 소학교 상오분 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로 뽑아간다고 해서 부모님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어요. 맞선 때의 첫 인상은 얼굴이 동그스름하시고 착하신 것 같았어요. 선은 봤지만 요새와는 달리 서로 접촉이 없이 결혼했으니까 서로를 잘 몰랐어요.』
참한 사람이니까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들의 권유로 한 결혼이었지만 힘들게 꾸려나온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렇다할 부부싸움 한번 못해보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조 여사의 얘기다.
조 여사는『피차 정열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하지만 이는『어떤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겠지…』생각하고 살았다는 한국 여성의 전통적인 인종의 미덕을 몸에 익혔던 조 여사와 유씨의 온화한 성격이 분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던 때문인 듯 하다.『시댁이 양주였는데 보리방아를 찧어 밥을 해 먹어야 했어요. 갓 시집가서 안 해 본 일을 하려니까 손바닥이 붓고 힘이 들어 밤이면 베개가 젖도록 울었어요.
도망 갈 생각까지 했다니까요…』고 조 여사는 고백한다.
『해방 후 6·25를 거쳐 항상 고생으로 지내오다 조금 숨을 물리고 나서 58년 바깥양반이 자유 문학상을 하셨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때 상금이 60만원이었는데 평생 처음 만져 보는 큰돈이었어요.』
아동문학의 마해송씨, 희곡의 오영진씨가 함께 상을 탔는데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당시의 반도「호텔」에 초대되어 상을 받자, 이제야 빛을 보게 되는구나 싶어 크게 보람을 느꼈다고 조 여사는 회고한다.
유씨와의 사이에 연진(35), 호혈(33)·호영(32) 씨 등 장성하여 결혼한 3명의 딸과 외아들 호창씨(26) 가 있다.<박금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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