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미야꼬 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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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날은 비가 갠 뒤라 길이 몹시 질었다. 「아스팔트」가 아직 깔리지 않았던 그 시절, 비만 오면 동경천지 어디를 가도 온통 팥죽길이었다.
내 신문가게 앞을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중학생 한 떼가 지나갔다.「우에노」역이 가까운 탓으로 그런 일이 가끔 있었지만, 그 중학생들은 사뭇 재미가 난다는 듯이 진창길을 일부러 발을 구르면서 지나갔다.
덕분에 흙탕물이 튀어 가게에 펴 두었던 신문을 절반이나 버려놓았다. 불교가 경영하는 그「부잔」(풍산) 중학교는「우에노」에서 20리 길이나 되는「고고꾸지」(호국사) 옆에 있었다.
흙탕으로 더럽혀진 신문을 뭉쳐들고 나는 전차로「부잔」중학을 찾아갔다. 직원실로 가서 교무주임인지 하는 선생을 만나기는 했으나, 미안하게 됐다는 사과는커녕 전연 성의 없는 코대답이다.
우리 학생 외에도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갔을텐데 하필이면 꽤「부잔」중학이 책임을 져야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돌아와서 긴 신문투고 하나를 썼다.
지금의「동경신문」의 전신을「미야꼬(도) 신문」이라고 했다. 이 신문은 조간 전문지로 3전하는 다른 신문보다 2전이 더 비싼 5전 짜리 신문인데다 경제란과 연예란이 특히 유명했다. 「마찌아이」(대합=예기가 드나드는 유흥업소)니 요정같은 데서는 으례 신문이라면「미야꼬」를 본다. 후일 대중 소실의 중흥조로 불리던 「하세가와· 신」(장곡천신)이며 극평으로 이름높던「이하라·세이세이엔」(이원청청원)들이 모두 이「미야꾜」신문의「멤버」들이다.
그런데 유별나게도 이 신문은 제1면「톱」에다 「독자와 기자」란 난을 만들어 독자투고를 거기다 실었다. 독자의 투서 하나를 맨 윗단 전부에 질리고 남은 글을 2단 3단에 걸쳐 6, 7행씩 신문제호에 붙여서 판을 짠다. 투서에 대한 기자의 답이나 의견이 그 뒤에 따른다. 「인생상담」같은 것이 후일 다른 신문애드 많이 생겼지만 이렇게 긴 글을, 그나마 신문 제1면 첫 단에 싣는다는 것은 두번 없었던 특이한「스타일」이다.
내가 보낸 투서는 내 아명을 따서 KYF라 는익명으로 2, 3일 후에「독자와 기자」란에 실렸다. 내가 쓴 글이 신문에 실리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전전 전후에 걸쳐 몇 차례 이 신문에 청탁을 받아 원고를 쓸 때마다 약간의 감회가 없지 않았다.
익명이기는 하나<「우에노」공원아래>라고 신문가게 위치를 밝혔으니 광고를 낸 것이나 다름없다.
새벽 전등 밑에서 신문을 접던 동료가(그 시절은 한장 한 장을 접어야 했다)그 바쁜 중에도 밑줄을 읽어 가다가『이거 네 투고 아니야?』하고 알아냈을 정도니 익명으로 낸 의미가 없다.
울분을 터뜨려 학교당국의 무성의와 중학생들의 꽤씸한 행동을 문책한 내 투서는 그날 안으로 뜻하지 않은데서 묘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시느바즈이께」의 주변은 요정과 「마찌아이」의 밀집지대다.
거기 예기들이「미야꼬」신문을 읽었다면서 『이거 당신이 쓴 글이죠. 읽다가 눈물이 났어요…』하면서 신문 한 장을 사고는 5원 지폐를 내놓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그냥 간다. 나는 뒤쫓아가서 기어이 거스름돈을 들려주었다.
네 다섯번이나 이런 승강이를 겪던 끝에 또 하나가 오더니 같이 가서 점심을 사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동점은 받지 않겠느라고 몇번 거절해도 당해낼 도리가 없다. 내가 거두어 넣은 신문광주리를 빼앗아 들고 앞장을 서는 그 예기를 따라 뱀장어 집으로 들어갔다. 뱀장어 (가바야끼=포소)는 약간 고급 축에 들어간다. 남비에다 신문지로 불을 살라 우동을 끓여 먹는 신세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성찬이다.
그 예기는 내가 부루퉁해서 젓가락을 드는 것을 보더니 안심한 듯이 돈을 치르고 먼저 돌아갔다. 먹고 나서 나는 또 한번 회계를 치렀다. 받았으니 일없다는 것을 기어이 값을 내고는 다음에 그 사람이 오거든 도로 들려주라고 이르고 그 가게를 나왔다.
이튿날은 더 수효가 늘어서 성화를 겪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도리없이 그 자리를 떠나기로 하고 동경서도 몇째 안 간다는 그「좋은 자리」를 다른 친구에게 물려주고는 그 보다는 훨씬 못한 동경제대 근처 본향 네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마음으로 존경할 수 없는 그런 여성들의 동점을 입는 것이 그지없이 창피하고 거북스러웠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소년기의 귀염성 없고 괴팍스러웠던 나 자신이 미워진다.
그때 그 여인들을 만일에 지금 만난다면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하고싶은 그런 심정이다.
귀염성 없는 소년기이기는 했지만 내게 그런 자존심이라도 없었던들 과연 그 뒤의 내 생활은 어떻게 됐을까-. 남의 동정을 강요나 하듯 「고학」을 무슨 간판으로 삼는 요즘의 일부 소년행상들을 만날 때면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무언가 가슴이 답답해진다.
고학은 자랑할 노릇도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값싼 동점을 거부할 그런 기개나 자존심이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너무 모자라는 것 같다. 지나친 자존심 탓으로 사서 고생도 했지만, 그 자존심이 나를 지켜주는 방부제 구실을 해준 것도 사실이다.
「중앙공논」의 도중 사장과의 문답은 그뒤 10년이나 지나서이지만 귀염성 없는 점에서는 둘 다 비슷하다. 진땀 나는 회상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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