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광복절 아침에 생각하는 교황의 말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땅에 내린 첫 말씀은 평화와 화해였다. 어제 오전 한국에 온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고 인사했다. 정전 61주년을 맞은 마지막 분단국가를 방문지로 선택한 교황의 깊은 뜻이 우러난 말이었다. 남과 북의 대치 상황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그의 세심한 배려는 도착 두어 시간 뒤 트위터에 올린 한글 메시지에서도 빛났다. ‘한국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특별히 노년층과 젊은이들에게.’ 한국전쟁을 겪은 구세대와 미래전쟁 대비로 병영을 지키는 신세대를 아우른 기도는 수천 회 리트윗되며 화제가 됐다. 보통사람들 곁에 머무는 교황의 마음이 한국인에게 접속됐다.

 청와대 행사에서도 교황은 남북 관계와 세계 평화가 얼마나 밀접한지 강조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평화라는 선물을 성찰하자고 독려했다. 교황은 특히 지속적인 외교 노력에 방점을 찍었다. 상호 비방과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로 풀어 가야 함을 적시했다.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과 씨름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지목해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취약 계층과 소통하라고 주문했다. 사회 개혁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교황의 발언은 종교적 복음인 동시에 사회적 복음으로 울려 퍼졌다.

 교황은 모든 사람을 위로하는 용기의 인간으로 각인됐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 손을 일일이 맞잡고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도 유족들은 눈물을 쏟았다.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으로 일궈낸 정의로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격려했다. 주교단회의에서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 달라 당부한 것은 한국 가톨릭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들린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가 과거에 비해 소홀해진 대목을 적확히 꼬집은 것이다.

 교황은 내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윤지충 외 123인 시복 미사’를 집전한다. 1801년 순교한 이들을 비롯해 조선시대 순교자 124명이 복자(福者) 칭호를 받는 한국 천주교 역사의 영광된 순간이다. 시복되는 이들은 대부분 천민과 아낙네들이었다. 새 세상을 갈구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 민초들은 교황이 그리는 인류의 진보를 향한 상징이다. 교황이 과거 순교자들의 정신을 되새기자고 이끄는 배경이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거대한 사회질서와 폭력에 항거했던 신앙운동으로서의 한국 초기 교회를 교황은 그 후손들이 이어주기를 기도한다.

 광복절 아침에 교황이 우리에게 내려준 말씀을 묵상한다. ‘조상들에게서 물려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전망으로 국가가 당면한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준비를 갖춰 달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