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도예사 연구에 큰 몫 기대-헌납한 동원미술관 소장품과 고 이홍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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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3대 고 미술품 수장가의 한 사람인 고 이홍근씨의 동원미술관 소장 문화재 2천9백여점의 국가헌납은 한국문화사상 처음인 일대의 쾌거였다. 헌납문화재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까지를 합하면 4천여점으로 늘어날 전망이어서 각계의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헌납문화재를 인수, 정리 보관할 국립중앙박물관은 앞으로 동원미술관의 고 미술품들을 문화재위원회 등을 통해 재평가한 다음 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대략2백억원으로 평가되고있는 동원미술관의 문화재들은 이씨의 수집과 애호에 얽힌 귀중한 「가치」와 함께 그 내용도 서화·도자기·불상·금속공예품 등 아주 다양하다.
특히 이들 문화재는 양과 질의 면에서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조선조까지 각시대적인 일품들을 망라하고 있어 한국회화 사 및 도자기 사 연구에 광대한 보고의 역할을 할 것으로 크게 기대되고 있다.
이홍근씨의 문화재 수집과 소장에 얽힌 일화들은 고 미술품 애호에 대한 「윤리」같은 것을 시사하는 것들이 많다.
어느 날 한 골동중개상인이 가져온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향노」가 충남 개심사의 사보임을 알아차린 그는 우선 물건을 사겠다고 확보해 놓은 후 개심사에 지급전보를 쳤다.
도난 당한 줄도 모르고 있던 개심사 주지는 이씨의 연락으로 급거 상경, 「청동은입사향노」를 찾게됐다. 이씨에게 큰 감명을 받은 주지스님은 그 후 매년 새해에는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는 것.
개성태생인 그가 큰 재산을 모은 것은 20대 후반 함북 성진읍에서 개풍상회를 차리고 만주와의 곡물교역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30대 초반 크게 자수성가를 이루어 고향인 개성으로 금의환향, 인삼경작·판매 등의 사업을 계속하다가 1947년 큰아들 상협씨 만을 남겨둔 채 5남2녀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67년 서울 성북동 자택 안에 별관으로 연건평 1백50여평의 동원미술관을 건립한 후부터는 일체의 대외활동을 끊고 집안에 칩거하면서 오직 문화재 정리와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는 문화재 보관창고인 지하실을 반드시 자신의 침실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게 설계한 동원미술관에서 거의 24시간을 기거했다.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 옆의 조그마한 침대 방에서 마지막 생을 거둔 동원 이홍근씨는 안채에는 기름을 아껴 「보일러」를 넣지 않아도 문화재 보관실과 2층의 전시실은 늘 온도를 맞추어 보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동원미술관이 개관된지 얼마 안 돼 일본의 모 재벌총수가 미술관을 관람한 후 마음에 드는 도자기 1점을 어떤 조건이라도 좋으니 양도해달라고 3일 동안이나 간청했다.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그래도 단념을 못한 일본인은 귀국 길의 공항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 재고를 간청했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
4천여점에 달하는 이씨의 수집 문화재는 하루에 1점씩 사들인다하더라도 11년이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더욱 일생동안 각별한 정을 담아온 귀중한 소장품들이지만 『수집 문화재는 자손에게 상속돼서는 안되며 하나의 문화사업으로 영구히 남는 일이 돼야한다』고 평소 늘 주장해온 그의 유지가 유족들에 의한 쾌거로 열매를 맺은 동원미술관의 문화재 국가헌납은 아무리 높이 평가돼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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