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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적 사고로 유연한 접근 못해 … 스스로 위기 갇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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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을 넘어 협력 의 시대를 열지, ‘지정학의 저주(詛呪)’가 귀환하는 것을 지켜볼지는 우리 선택의 몫.”(윤병세 외교부 장관, 6월 외교부-동아시아연구원 주최 국제회의)

 “아시아는 19세기 유럽과 같다. 군사 충돌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지난 2월 뮌헨 안보 콘퍼런스)

 한반도와 중국 등을 중심으로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한 말들이다.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외교의 위기가 단순히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유동성이 큰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만들어진 위기’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에게 현재 한국 외교가 위기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1점(전혀 위기가 아니다)~10점(절체절명의 위기다)을 척도로 답해달라고 한 결과 30인 전체 평균은 4.9점이었다. 위기는 위기지만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답이었다. 국내와 해외 전문가들의 시각이 달랐다. 30명 중 국내 전문가들(21명)의 위기지수 평균은 5.4점이었다. 반면 미국(3명)과 중국(3명)의 전문가들은 1~3점으로 낮게 평가했다. 현재 순항 중인 한·미, 한·중 관계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점을 매긴 로버트 해서웨이 우드로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국장은 “한국 정부가 도전과 불확실성에 직면한 건 맞지만 다른 강대국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 정도가 더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일본 전문가 3명의 답이었다. 1명은 5점, 2명은 6점으로 모두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한국의 외교를 위기라고 진단한 것이다. 한·일 관계의 현주소가 반영된 결과다.

 한국 외교가 직면할 가장 큰 위협으론 미·중 관계의 충돌을 꼽은 전문가가 많았다. 30명 모두 만장일치로 ‘미·중 관계 악화가 한국에 부정적’(평균 2.9점)이고, ‘미·중 관계 개선이 한국에 긍정적’(평균 7.7점)이라고 답했다. 다만 위협이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은 4.5점으로 다소 낮았다. 미·중 관계가 갈등하기도 하고, 협조하기도 하는 협력적 경쟁관계인데 과거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 관계로 보면 안 된다는 지적이 많았다.

 프랭크 자누지 미국 맨스필드재단 사무총장은 “한·일 관계나 중·일 관계 등 동북아 정세는 제로섬으로 볼 게 아니라 서로가 윈-윈 관계로 전개되는 게 바람직하다”며 “미·중 관계도 경쟁할 땐 하지만 상호 의존도가 높아 관계 개선을 위한 공식·비공식 대화통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대부분의 전문가는 지금의 위기 상황이 냉전적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전략적으로 판단을 잘못해 생겼다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국제학부 박인휘 교수는 “구한말 때와 비슷한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북핵 문제 고착화, 일본의 정상국가화, 중국의 부상 등 현상 변화가 일어나며 미·중·일 사이에 끼어 있는 구조적 한계가 확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최근까지 한국은 강대국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수동적으로 흐름을 탔는데, 이제는 그들이 한국에 뭔가 대책을 내놓고 방향을 제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며 “한국은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북아와 세계 정세에 영향을 미칠 결정을 주도적으로 할 기회를 맞았다”고 강조했다. 끌려다니는 위기가 아니라 주도하지 못해서 생긴 위기라는 얘기다.

 동국대 북한학과 고유환 교수는 “한국 외교가 난관에 처한 것은 사고가 여전히 냉전구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며 “탈냉전시대에 맞는 실리외교 전략을 본격화하지 못하고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I) 이숙종 원장도 “위기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며 “다만 우리 정부가 이전과 다른 복잡하고 복합적인 국제 환경에서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어려워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외교가 안보에 매몰돼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희옥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장은 “지금 정부의 외교정책을 보면 상대적으로 안보 논리가 외교를 지배하고 있으며 국가 전략을 짜는 데 있어 외교적 측면과 안보적 측면이 체계화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고유환 교수는 “외교와 대북정책에서 외교부와 통일부는 없고 청와대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나치게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며 현안 위주의 수동적 대응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을 지낸 성균관대 김태효 교수는 “우리나라의 외교 중심 전략은 가치와 체제를 공유하는 한·미 동맹을 주축으로 북한 위협에 대응하고, 주변국과는 적정한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이 전략은 변한 적이 없지만 이에 대한 확신과 이해가 떨어지는 데다 국내 정쟁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주변의 변화를 보고 불안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유성운·정원엽 기자, 베이징·도쿄·워싱턴=최형규·김현기·채병건 특파원, 권정연·차준호 대학생 인턴기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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