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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알렉산드로스, 코스모폴리탄 문화 창조한 세계화 선구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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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20면

그림 1 『샤나메』의 삽화, 1480-1490년. 갑옷을 입은 승자 알렉산드로스가 패자인 다리우스 3세(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의 ‘사후의 안식’을 기원하는 모습이다.

그림 1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중국풍(몽골풍)의 얼굴과 복장을 하고 있다. 인물들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화법에서도 중국적인 느낌이 풍긴다. 들판을 메운 풀과 꽃은 서아시아 내지 중앙아시아풍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쪽과 아래 왼쪽에는 페르시아어로 쓰인 문장이 보인다. 이 그림이 제작된 1480년대는 페르시아에서 티무르왕조가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하던 때다. 티무르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 둔 튀르크-몽골계 제국으로, 종교적으로는 수니파 이슬람이 지배한 왕조였다. 이상의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이 그림은 몽골과 페르시아의 문화를 융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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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림이 제작되기 약 1800년 전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이 묘사돼 있다. 기원전 333년 아나톨리아 남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 군대와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제국의 군대가 격돌한 이수스 전투가 그것이다. 이 전투는 그리스 세력과 페르시아 세력 전체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전이었다. 이 역사적 전투에서 승자는 알렉산드로스였고 패자는 다리우스 3세였다. 이 그림의 제목은 ‘죽어가는 다리우스를 위로하는 알렉산드로스’이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다리우스의 임종을 알렉산드로스가 지켜보는 상황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는 죽음을 앞둔 적장의 명예를 지켜주는 포용력 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480년대에 발간된 페르시아의 장편 서사시 『샤나메(Shahnameh)』에 수록된 삽화다. 샤나메는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시인 페르도브시(Ferdowsi)가 페르시아제국의 역사와 전설을 주제로 쓴 서사시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전역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었다. 샤나메는 15세기부터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후원을 받아 삽화를 동반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출판됐다. 태초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7세기까지를 다루는 이 서사시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영웅시대를 매듭짓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페르시아 왕위 계보의 정통성을 보유한 인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다리우스는 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그는 왕비와 가족들을 그리스 군의 포로로 남겨둔 채 박트리아로 피신하여 재기를 꿈꿨다가 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화가는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면모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리우스가 포용력 넘치는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임종을 맞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림 2 『Talbot Shrewsbury Book』, 1444-1445년.

다른 문화권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알렉산드로스만큼 생애와 모험담이 다양한 문화권으로 전해진 인물도 드물다. ‘알렉산더 로망스(Alexander Romanc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의 이야기는 그리스어로 처음 쓰인 후에 4세기~16세기 사이에 라틴어·아르메니아어·히브루어, 그리고 중세 유럽의 각종 지역어로 번역돼 전파됐다. 특히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알렉산드로스의 활약상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전설의 아마조네스 부족 여왕과 만나는 이야기, 아프리카 남쪽에 사는 머리가 없고 몸통에 눈이 달린 블레미아라는 괴물부족과 대적하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그의 모험담은 땅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림 2를 보자. 1440년대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유리로 만든 통 속에 들어가 해저를 탐사하는 대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히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영웅 중의 영웅의 풍모라 하겠다.

그림 3 소도마,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선 다리우스 가족의 여인들』(부분), 1517년경.

또 다른 그림을 보자. 그림 3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소도마(Il Sodoma)의 작품이다. 다리우스가 도주하면서 남겨둔 가족들을 맞이하는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 1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의 가족들을 예를 갖추고 맞이하는 인자하고 포용력 넘치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유난히 포용력이 강조됐을까? 아마도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때가 20대 초반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웅으로 추앙을 받게 된 데에는 약관의 나이에 그리스의 변경인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인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사적 승리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특히 젊은 지도자로서는 물리적 성취만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와 ‘포용력’이 영웅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조건이었을 것이다. 지혜에 관해서는 어려서부터 받은 특별한 교육이 해답을 제시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대학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당시 13세였던 알렉산드로스에게 3년에 걸쳐 철학·윤리학·문학·자연과학 등을 가르치게 했다. 이런 교육이 알렉산드로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시를 즐겨 읽었으며, 원정에 여러 유능한 학자들을 대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젊은 정복자로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던 면은 포용력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를 영웅으로 숭상하는 맥락의 그림들이 그의 넓은 아량을 강조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포용력은 ‘영웅 만들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점령지역을 실제로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도 포용력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와 오리엔트를 잇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 문화로 대제국을 통합시키고자 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나오듯이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정의와 평화라는 축복을 모든 국가에 뿌려서 적셔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세계화는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그리스화(Hellenization)가 아니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문화와 잘 융합된 개방된 그리스제국이었다. 포용력은 정복을 당한 페르시아 사회에 대한 대왕의 호의적 제스처였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알렉산드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인 에피푸스(Ephippus)는 대왕에 대해 흥미로운 비판을 남겼다. 대왕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처녀사냥꾼 아르테미스를 흉내 내 여자 옷을 입고서 사냥을 즐기곤 했다는 내용이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에피푸스의 비판이 터무니없는 중상이라고 본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실의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로 페르시아 복장-그리스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성스러워 보이는-을 하고 사냥에 나서곤 했던 사실을 에피푸스가 악의적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대왕의 의도는 자신의 대제국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융화되는 것, 즉 코스모폴리탄한 가치와 제도가 통용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국 곳곳에 20여 개의 도시를 지어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하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한 사실도 이에 잘 들어맞는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헬레니즘이라고 불리는 범(汎)그리스적 사조가 번영했다. 동시에 광대한 지역이 단일한 경제권으로 통합됐다. 무역이 활성화돼 세 대륙을 잇는 상인의 행렬이 이어졌고, 대왕의 얼굴을 새긴 주화가 제국 전역에서 사용됐다. 이렇듯 알렉산드로스는 세계화의 선구자로서 인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불과 33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지만, 그는 세계적 영웅으로 인정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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