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벌 광목작업복에도 뜨거웠던 호국의 정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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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늘(9월6일)로 우리여군이 창설 30주년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새삼 갖가지 감회가 가슴에 오간다.
우리 여군 1기생 5백명이순수한 열경으로 군문에 들어간것은 6·25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50년 8월,피난지 대구에서 였다.
당시 김현숙대령은 여군을 모집하기위해 부산과 대구의 극장을 돌면서 순회 강연을 했는데 그의 강연은 커다란 반영을 일으켜 여군지망자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5백명 모집에 지원자가 3천여명으로 오늘날의 대학임시를 방불케하는 6대1의 경쟁이었다. 우리는 논문·국어·수학·면접·신체검사를 치렀는데 합격자를 발표하던날,대구의 육군본부앞에는 합격자명단에 들어있지않은 응시자들이 그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우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당시로는 시험을거쳐 추려낸 사람들이었지만 전시의 혼란기에다 딱이 연령이나 자격제한이 없었던 까닭에 우리 1기5백여명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10대여학생부터 여고재학생,전직 교사,경찰관,50대에 가까운 가정주부까지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합격발표가난후 부산에 생긴 여군훈련소에서 우리는 약1개월에 걸쳐 집중훈련·야간훈련등 남자 군인들과 똑같이 엄격한 훈련을받고 각기 1등병으로 임관했다.
당시 우리를 가르치던 교관들은 대부분 전쟁전 육사의 교관을 하시던 분들이거나 전쟁전에 각여학교의 체육교사 출신이시던 분들로 현성원·박을희· 홍소운· 류순숙· 윤희렬· 여선익씨등이었다.
훈련을 끝내고나니까 곧 9·28수복이 되어 여군들은 그누구보다도 빠르게 텅빈 서올거리를 자랑스럽게 입성했었다.우리 동기생들은 전방깊숙이 들어가 방송을 하는등 선무황동을 했고 경리·통신·기록등의 후방업무를 맡기도했다.
여자포노신문관으로 활약기도했다.최전방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동기생도 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훈련시절의「에피소드」하나. 훈련이끝나가던 어느날 저녁 교관은 훈련생 모두를 모아놓고 내일 최전방 전투부대로 떠나는데 지윈자만 보내니 지원할 사람은손을 들라고 했다. 우리는 거의대부분이 손을 들었고 한밤중M1소총「카빈」· 권총까지 휴대하고 출동했다.밤새워 짐차를타고 항군하여 막사로 들어가니 우리가 훈련받던 부산의범일동 여군훈련소가 아닌가.
매관들이 우리의 정신상태를「테스트」해 본 것이었다.
한편 가가 막히고 아쉽기도했던 그때의 기분을 지금도「기러기」란 모임으로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재경 여군1기출신 15명은 가끔 이야기하며 순수했던 젊은날의 우리들을 되들아보며 그리워한다.
그후 후배들도 많이 들어왔고 여군훈련소는 국방부의 여군과·여군부,나아가 여군회를거쳐 71년 여군단으로 발전을거듭해왔다.
내자신도 육군 일병에서 츨발하여 여군단장을 지내고 대령에서 76년 예편할때까지 군과 함께 자랐고 고악믈 같이하며 늙어가고 있다.
광목에 푸른물을 들여서 만든 단벌작업복이 훈련복이고, 전투복이고 잠옷이었던 궁핍했던훈련시절 우리는 옷을빨면 밤새워 수건에 싸 말리고「매트리스」에깔고자며 주름을 세워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젊었던 시대의 순수했던 애국심과열정이 그리워진다. 『한번 여군이면 영원한 녀군』이라고 다짐하는 우리들은 여군의 앞날에 보다 큰 발전과 영광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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