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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걸어다니는 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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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운동 삼아 집 근처의 하천 변을 걷기 시작한 지 3년째다. 물소리, 풀냄새에 젖어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나 매사가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법. 나의 산책에도 피할 수 없는 천적이 있으니 얼굴 전체를 마스크로 가린 채 나타나는 가면족이다. 햇살이 뜨거운 낮 동안에야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컴컴한 저녁에도 가면을 쓰고 불쑥 등장하는 이들은, 새가슴을 가진 나에게는 가히 공포다.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끼리 풀어 놓던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이 현실에 나타나는 느낌이랄까. 상대방의 입장에서야 내 좋은 대로 사는 데 뭐가 문제냐고 항변을 할 수도 있겠다. 엉덩이까지 흘러내리는 바지를 입는 것도, 한여름에도 털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도 제멋인데 말이다.

 예술에도 종종 가면이 등장한다. 5세에 왕위에 올라 오랜 섭정과 반란을 경험한 루이 14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기를 원했다. 절대왕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예술이고 소품은 가면이었다. 그는 온 몸을 금색으로 칠하고 태양 가면을 쓴 채 궁정발레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었다. 태양 가면은 아폴로신을 상징하며 그가 프랑스에 빛을 안겨주는 왕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히틀러의 충복 괴벨스가 선전선동의 천재였다고 하지만 루이 14세 역시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베르디 오페라에서 주인공 국왕이 암살당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의 무대도 바로 가면무도회다. 구스타프 국왕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신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아를 연모하여 신의와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부르는 아리아는 듣는 이의 마음을 절절하게 적신다. 그는 친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배신감에 불타는 레나토에게 살해당한다. 때로 사랑보다 강하고 무서운 것이 분노다.

 서양에서만 가면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을 바꾸는 변검은 중국이 자랑하는 전통예술이자 기예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항우의 애첩 우희 역할을 맡았던 장국영이 스스로 칼을 빼서 자결하는 장면은 시대를 뛰어넘어 가장 애절한 명장면이다. 영화가 나오고 10년 뒤 장국영 자신도 자살한 때문일까, 다시 보는 ‘패왕별희’는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면을 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면이 감추고 싶은 나쁜 모습을 가리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읽었던 ‘늑대와 어린 양’ 이야기는 가면 속의 진정한 얼굴을 보지 못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교훈을 위협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신분을 감추는 데에는 가면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지체가 너무 높아 맘껏 놀 수 없던 왕과 귀족들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 가면이 주는 자유다. 가면이 높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천민들도 가면만 쓰면 그 순간만큼은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탈춤에서 쏟아내는 거친 입담과 날카로운 풍자는 가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생에서 정작 위험한 것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니 더욱 그렇다. 버젓이 영상기록이 있는데도 전에 자신이 했던 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치가가 그렇고, 휠체어를 타고나와 심각한 건강의 문제를 호소하다가도 재판이 끝나면 곧 원기왕성해지는 기업가가 그렇다. 어디 이들뿐이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장애 학생들을 오히려 성추행하는 도가니의 주인공들도, 어린 학생들을 바다에 버리고 배에서 도주한 선장과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부하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사망하게 만든 군인들에 이르면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들이야말로 가면 없이도 가면을 쓰고 사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진정한 후예다.

 이들과 비교하면, 값싼 가면으로 무장한 채 당당하게 걸어가는 가면족은 오히려 어수룩하고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적어도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숨기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제발 저녁만큼은 가면을 벗고 나오기를. 어둠이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아늑한 가면을 씌워주고 있지 않은가.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