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서울시향과 장한나 협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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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광대가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13일 예술의전당에서 서울시향을 지휘한 로린 마젤(뉴욕필 음악감독)은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음악가의 본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단원들에게는 음악하는 보람과 긍지를 심어줬고 청중에게는 음악 듣는 기쁨을 선사했다.

이날만큼은 지휘자를 마주 보는 합창석이 로열석 구실을 했다. 지휘자의 세심한 동작과 표정을 지켜볼 수 있었고 합창석을 배려한 지휘자의 각별한 인사까지 받았다.

마젤의 지휘봉은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움직였다. 원하는 대로 누구라도 홀릴 수 있는 신비한 주문(呪文) 같았다. 친절하다 싶을 만큼 자상하면서도 절제된 동작-. 부드러운 미소만으로도 오케스트라 전체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었다. 단원들은 그 마법사의 지팡이를 타고 신비로운 음악 세계를 훨훨 날았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에서 마젤은 이 '젊은 대가'의 튀는 음악을 그대로 다 받아줬다. 마젤이라면 로코코 풍의 우아함과 가벼움 속에 낭만을 은근히 숨겨두었겠지만 장한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힘있고 당찬 모습이었지만 마젤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고 싶은 치열한 몸부림이도 했다.

마젤은 달랐다. 오케스트라의 현실을 인정했고 무엇보다 관객의 요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들어줬다. 이렇듯 민주적 절차를 밟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결국엔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방식대로 음악을 몰고 갔다.

어디까지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 대해 관객 스스로 택한 굴복이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 5번'은 무색무취한 듯 얼떨결에 지나갔지만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다.

마젤의 무게는 그만큼 컸다. 준비해둔 세 곡의 앙코르가 끝나고도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난처해진 마젤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퇴장하려고 악장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단원들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마젤의 지휘로 언제 또다시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잠시 황홀했던 추억 때문에 되돌아온 현실이 더욱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홍승찬<음악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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