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혁명…방북과 소멸 팔레비의 「영욕6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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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팔레지」전「이란」왕은 어느 독재자들의 종말보다 더한 고독과 우울, 환멸과 좌절의 한을 품고 영욕의 60년을 일기로 최후를 맞았다. 사돈인「삭다트」대통령의 우정을 제외하면 암살 공포, 지병의 고통만이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고「모하메드·레자·팔레비」는 19년10월26일 탄생, 21살의 겁 많고 순진한 청년 때인 41년9월18일 부왕 「레자·칸」의 왕권을 계승받아 38년간 집권했다. 부왕이 소련과 영국의 압력으로 퇴위하자 수개월만에 젊은 나이로 등극했다.
그는 39년 「이집트」의 「파르크」왕의 여동생「프지아」공주와 결혼, 딸1명을 낳았으나 10년만에 파경, 49년 「이란」여성인 「고라야」와 재혼, 아기가 없어 58년 다시 이혼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지금의 「파라」전 왕비와는 59년에 결혼, 최근「사다픈」의 딸과 결혼한 「레자·사러스」군(19·전황태자)등 4명의 2남 2녀를 낳았다.
집권기간 중 최초의 위기는 46년 12월에 일어났다.
2차대전의 전과로 소련이「이란」북부의 「악자르바이자」생을 완전 장악할 위기를 맞았을 때 그는「꼴례스탄」궁에서 현명하게 대처하여 「이란」군대를 지휘,「아자르바이잔」성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영도력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51년 3월 당시의 「모사데크」수상이 사실상 「미라」의 최강자로 부강하면서부터 두 번째의 위기를 맞았다.
「모사데크」는 중·상류층을 배경으로 석유산업의 전면 국유화와 주권의 제약조치를 만해하기 시작, 끝내 53년 군중을 선동하여 이 해 8윌 「팔레비」를 망명길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팔레비」는 「이라크」와 「로마」체류 6일만에 미국의 CIA와 충복「자에티」장군의 반「모사데크」군부「쿠데타」성공으로 귀국, 실권을 장악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이후 「팔레비」는 미국과 지나치게 밀착 미국 쌀 수입으로「이란」인의 식성마저 바꾸게 했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는 62년1월 농노 및 여성해방, 문맹퇴치를 골자로 한 백색혁명을 제창, 63년6월 지금의 「호메이니」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한 반혁명분자들을 체포, 「호메이니」를 끝내 「터키」와 「이라크」등지로 망명케 했다.
정보원을 포함한 6만 여명의 「사바콘 (비밀경찰요원)으로 현저한 탄압 정치를 하면서도 고질화된 공무원부패, 비능률행정, 부의 공정한 분배 등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팔레비」의 몰락을 가져온 요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재임 중 두 차례, 망명 중 세 차례 등 모두 5번의 암살을 모면해야 했다.
그러나 「이란」을 경제 부이으로 건설하려했던 그의 노력은 특히 72년 이후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 1인당 국민소득이 60년의 76「달러」 에서 그가 실각한 79년엔 무력 2천5백「달러」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군사력 강화에 지나칠 만큼 투자, 미국과의 군사 협력으로 공군력을 급 성장시켜 66년 세계 29위의 군사비가 76년엔 8위가 될 만큼 막강한 군사대국이 되도록 했다.
외교 면에서도 중립을 표방, 숙적인「이라크」와 「라이벌」의식이 강한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소련과도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처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부는 일부에 치우쳐 「팔레비」의 국민적 지지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 국민의 50%룰 점유하는 농촌인구의 10명중 9명은 흙담집에 살았으며 이 때문에 이농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 인구의 10%가 부 전체의 4O%를 차지하는 엄청난 불공평을 초래, 사회 불안의 밑거름이 됐다.

<조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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