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고달픈 고3생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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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하향식 고교평준화, 학부모들의 빗나간 교육열, 일류 지상주의의 사회풍조-.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모르게 얽혀버린 이 몇 가지가 공동 연출하는「과외열풍」, 그 속에서 황금 같은 사춘기를 보내야 하는 한국 고3생들의 하루하루는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까.
우선 대표적인「고급 안방 과외파」에 속하는 K군의 하루를 쫓아가 보자.
아침 기상 시간은 6시30분. 고3생으로서는 다소 늦은 편이지만 밤늦도록 시달리는 몸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상 시간을 앞당기다가는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돈암동인 집에서「버스」로 10분 거리인 학교에 허겁지겁 도착하면 7시, 이때부터 어느 인기연예인이나 사회 저명인사보다 바쁜 하루「스케줄」이 시작된다.
7시10분부터 8시까지 보충수업을 받고 나면 8시30분부터 시작된 정규수업이 모두 7교시로 4시에 끝이 난다. 30분 정도 쉬고 나면 4시30분부터 두 시간동안 오후 보충수업을 받게된다.
모두 10교시를 영어단어와 수학공식, 15세기 한국어와 물리·생물·상업 등에 파묻혀 지내는 셈이다.
남이 보기에는 학교 수업만도 빠듯하고 힘겨운데 정작 K군은『학교 선생님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만 매달리는 것이 좀 불안한 느낌이예요』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K군은 고1때부터 과외를 시작, 대학입시를 6개월 앞둔 현재 영어·수학·국어를 비롯한 5과목을 과외지도 받고 있다.
과외시간표는 월요일이「정치경제」한 과목, 수요일이 영어·국어, 금요일이 물리, 일요일이 수학·국어로 짜여져 있다.
시간은 한과목이 대개 한번에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국민학교 동창들끼리 모인 K군의 과외「팀」은 엄마들의 긴밀한 협동작전 아래 강사를 모셔온다. 과목당 과외비는 확실치 않지만 5만∼6만원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외비로만 우선 25만∼30만원이 드는 셈이다.
과외가 없는 화·목요일에는 대학생 가정교사가 집으로 찾아와 영어·수학 두 과목의 예습·복습을 도와준다. 결국 K군이 자기시간을 갖는 것은 3차례의 끼니때와 밤10시30분이 넘은 깊은 밤.『과외공부를 학교공부 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지만 매일 매일을 일방적인 강의로 보내다보면 가끔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다른 모든 고3생이 그렇듯 지난달 16일 TV과외가 실시되면서부터 K군의 일정가운데 TV과외도 한몫 차지하게 됐다. 시간이라도 좀 앞당겼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직 습관화되지 않아 밤11시10분부터 거의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TV과외도 그래서 K군에게는 우선 시간적으로 벅차게 느껴진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 같지만 K군의 경우를 생각하면 소화할 능력도 시간도 모자라는 사람에게 음식물만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고3생 전부가 K군과 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화여고 3학년주임교사 박재희씨는『몇10만원짜리 과외를 하는 학생은 아마 한반에 서너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남학교의 경우, 여학교보다 조금 높은 열기를 감안하더라도 한반에 7∼8명은 넘지 않으리라는 게 그의 추산.
숙명여고 3년 배근영양은 최고급 안방 과외파가 약10%, 국·영·수 세과목에 5만∼6만원 정도하는 B급「그룹」과외파가 약60%, 학원 단과반 정도의 도움으로 혼자 공부하는 독학파가 약30%정도라고 분석했다.
B급「그룹」과외파의 하루가 K군의 그것과 흡사한 반면 독학파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북아현동에 있는 J여고 3년 L양은 대표적인 독학파. 상오7시30분에 시작해서 하오6시에 끝나는 학교수업 외에 L양이 과외로 하는 공부는 수강료 6천7백50원짜리 물리과목 단과반 뿐이다.
피곤한 상태로 저녁에 공부하는 것보다는 새벽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5시반에 시작하는 새벽반을 다니고있다.『과외공부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모자라는 과목을 보충하고 싶은 것은 수험생 누구나 똑같을 것 같아요. 문제는 효과도 얻지 못하면서 남이 하니까 불안해서 나도 한다는 풍조가 널리 퍼진데 있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도서관과 교실에 불을 켜주는 하오10시까지 친구들과 남아서 공부하고 온다는 L양은 공부는 결국 자기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뚜렷하게 박혀있다.
『저처럼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친구가 한반에 10∼15명은 돼요. 친구들끼리 TV과외의 예습·복습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들처럼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TV과외가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국어의 경우 시간이 너무 늦고 수학은 푸는 과정을 그냥 보고있는 것만으로는 실력향상에 별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한 과목에 몇만원씩하는 과외에 자가용을 타고 몰려다니는 몇몇 친구들을 볼 때『불안하지는 않지만 막연히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낀다』는 L양에게 과외공부 없이 Y대에 합격한 학교선배의 얘기는 큰 위로가 된다고.
K군과 L양, 이들이 한 달에 들이는 과외비의 비율은 약30대1, 그러나 이들이 소화하는 교육의 양도 30대1이 될 것인지-. 어쩌면 거꾸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교육자들의 지적이다.<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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