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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4)한국은행(17)-다시 대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급거 출동한 미군 장병들은 한국사정에 너무나 생소했던 까닭에 각가지「난넨스」를 빚어냈다.
부산에서 지금은을 미국 선박편으로 탁송하고 대구로 돌아갈 매 기차편을 이용했다. 민간 철도편이 없어서 미군열차에 편승했는데 사실은 진해에서 연일 밤샘을 하며 작업을 한끝이라 하도 피곤하여 좀 편하게 가보려고 기차를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타놓고 보니 이 미군열차는 대구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부대의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보급품을 배달하는 기차였다. 더구나 한국실정에 전연 낯선 미국군인들이 번번이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편하기는커녕 번거로운 여행이 되고 말았다.
나는 기차에 타자마자 차장을 불러 일손부족으로 제때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애쓰는 철도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미리 준비해간 빵을 주며 이것으로 배나 채우라고 했다. 이제는 만사를 잊고 편히 쉬자는 판인데 미군장교가 나타났다.
통역을 해달라고 해서 따라가 보았더니「플랫폼」에 기관사 이하 열차승무원을 전원 세워놓았다. 그는 성심껏 일을 해라, 한눈 팔지 말고 사고가 안나도록 해라,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요지의 일장연설을 하더니 나더러 통역을 해주라고 했다. 요컨대 임무는 완수해야 되겠는데 한국실정에는 전연 어두우니 겁은 나고 이리저리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부산을 떠나 꾸벅꾸벅 졸고있는데 흔들어 깨워 눈을 떴더니 야단났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따라가 보니 황소는 쓰러져 있고 농부는 꿇어앉아 열심히 빌고 있는데 미국군인은 총을 겨누고 있었다.
기차에 받쳐서 소가 다쳤다는 것이다.
미국군인은 소가 고통을 겪고 있으니 총으로 쏘아 안락사를 시켜야 된다는 것이고 농부는 소한마리면 큰 재산이니까 제발 소를 살려달라고 빌고있는 중이었다 소의 처분은 소임자에게 맡기라고 해도 고통스러워하니까 총으로 쏘아 죽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억지로 뜯어말렸다 기차는 동해안의 미군주둔지를 여기저기 들러 포항에 도착했다. 미국 군인이 큰일났다고 또 쫓아왔다. 이번에는 공산군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공산군이 포항을 위협하고 있을 때 였으므로 나도 깜짝 놀랐지만 미국군인이 공산군이라고 가리키는 것을 보니 상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장사항렬의 명정이 빨간천으로 되어있으니까 공산군이 적기를 들고 행진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설명을 듣고 같이 포복절도했던 것이다.
대구에 돌아오니 조병왕 내무부강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성에 중석광이 있는데 여기에 강원도 상동광산에서 종업원이 내려와 있었다. 상동광산은 세계굴지의 중석광인 만큼 식구도 많은데 이 큰 세대가 달성광산에 앉혀 있으니 피차 살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상동광산 치다꺼리로 인해서 달성광산 광부들의 봉급지급까지 어렵게되자 양자간에는 감정대립이 생기고 이것이 점점 격화하여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당시 대구에는 내무·재무 양장관과 총무처장이 남아있는 정도였고, 행정은 거의 도청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방관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결국 내무부장관이 문제해결에 나서게되고 백장관은 문제를 한국은행으로 들고 왔던 것이다.
달성광산이 가지고 있는 중석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인데 한국은행에서 문제를 처리하자면 일반대출은 할 수 없으니까 외무부를 통해 수출금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당시 중석의 국제시세가 높고 수요도 왕성했으므로 먼저 융자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중석은 동경지점으로 보내가지고 수출대금으로 결제를 했다.
한국은행은 민간에 대한 일반금융을 할 수 없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래도 일반은행이 처리해야할 문제가 발생하는데 당시 본부의 기능이 살아있는 은행은 하나도 없었다.
공산군은 대구에 육박하여 팔공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영천을 위협했다. 8월20일을 전후하여 대구역 근방에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대구시민이 피난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은행도 대구지점만 남겨놓고 8월22일을 기하여 임시본부를 부산으로 이전했다.
부산에 내려오자 각종 금융기관의 운영을 정상화함으로써 전시하 금융기관의 사명을 완수케 하기 위하여 각 금융기관의 임시본부 설치를 추진했다.
각 금융기관의 임시본부는 9월l일을 기하여 각기 그 부산지점에 설치하고 업무부와 총무부를 두기로 했다. 임시본부장은 임원이 있을 경우에는 수석임원을 ,임원이 없을 때에는 부산 지점장을 임명키로 하고 본부의 간부가 남하하지 못한 은행이 허다했으므로 필요할 때에는 한국은행 직원중에서 임시본부장의 고문 또는 업무부장과 총무부장을 파견키로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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