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남인과 떼어 수용, 매일 목욕시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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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75년8월 어느 날 [사이공]에 있는 모국 대리대사관저에 월남친구가 방문했다. 그전에도 이따금 그랬듯이 대리대사는 월남친구에게 자고 가라고 했다. 밤12시쯤 초인종이 울렸다. 월공 경찰의 불시가택검문 이었다. 대리대사는 대문까지 나가서 이곳은 월공 주권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라 했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리대사는 국제법의 외교관 면책특권을 계속 내세웠으나 경찰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방 저 방을 수색하니 월남방문객이 나왔다.
경찰은 그에게 이 집에서 잘 수 있다는 동회 안녕원이 발급한 숙박 허가증을 내 놓으라 했다. 대낮에 부모가 이웃면에 사는 딸네 집에 가는 것도 안녕 원의 허가증이 있어야하고 같은[사이공]시내에 있는 형무소에 가족들이 차입품을 들고 가는 것도 안녕 원의 허가증이 있어야한다.
대리대사관저로부터 불과 3백m거리에 월남 친구 집이 있다하더라도 안녕 원의 허가증이 있어야 숙박이 가능했다. 죄송하다고 빌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리대사까지도 경찰서로 연행해갔다. 다음날 새벽대리대사는 풀려 나왔으나 월남방문객은 석방되지 않았다.
1975년9월 어느 날 북 월맹에 사는 50대 여인은 [사이공]에 사는7O대 부모를 만나러 내려왔다.
여행허가증을 얻는데 꽤 힘이 들었다한다.
21년 만에 자기 딸을 본[만]노인은 깜짝 놀랐다.
잘 생기고 살이 쪄있던 자기 딸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른 생선처럼 비쩍 마른 데다가 생활고에 시달린 피로한 영양실조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거미줄 같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만」노인의 부인, 즉 어머니보다도 딸이 더 폭 싹 늙어 있었다.
[프랑스]식민 시대부터 기상대에서 근무, 기장대장까지 지낸바 있는 [인텔리]의 [만]노인은 성격이 좀 팔팔한 편이어서 윌공 위정자들에 대한 욕을 했다. 이것이 화가 되어 [만]노인은[치화]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로부터 5년 재판한번 받은 일없이 E동 제2층 제5호실에서「만」노인의 허리는 점점 구부러지고 몸은 더욱 빠져가고 있었다.
1975년9월21일 화폐 개혁이 있었다. 한 가구만 신화2백「동」(그 당시의 암거래시세로 50「달러」)에 해당하는 구화 만을 교환해 주고 그밖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은 보관증 한 장을 써주고 모두 압수했다. 여기에 반발해서 한마디씩 한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구정권 때부터 한국인이 경영하는 지미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중년의 식모는 부엌에서 번 돈을 꽁꽁 뭉쳐 꽤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50[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만 교환되고 나머지는 보관이라는 명목으로 몰수되었다. 그 식모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통곡을 했다.
1980년 초의 월공 경찰대위의 한달 봉급은 1백[동] 이었다. 암거래시세로 환산하면 6「달러」50「센트」다. 인민대의원(국회의원)이나 차관 급의 한달 봉급은 1백7O[동]이었다. 암거래시세로 하면 약11「달러」다. 양담배 한 갑의 시중시세는 약50[동]이었다.
[러닝셔츠]를 못 입은 장교간수가 반 이상이며 영어글자가 적혀있는 밀가루부대를 가지고 [팬츠]를 만들어 입은 간수도 있었다.
한 간수장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산 속에서 15년 간이나 혁명사업(베트콩)을 했는데 그때는 쌀밥을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남북이 통일되고 사회주의국가가 되었는데도 지금은 배가 고프다.
한 달에 쌀. 보리. 고구마를 합해13Kg만 배급되니 먹고 지내기 힘이 든다.』
MIT 출신의 어떤 수감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남은 지도상으로는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적자통일입니다. 즉 [마이너스]통일이지요』
월남인 [룸. 메이드]들과 장기도 두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세월은 꽤 흘러 l977년이 지나가고 1978년도 3월15일이 되었다.
이날 오후 2시쯤 간수가 불러서 서 영사. 안 영사와 함께 구대 본부로 내려갔더니 방안에「광대뼈」가 부하 2명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대뼈]였다. 그는 나에게『제2차 심문을 하러 또 오겠다』고 위협을 하고 사라진지 만2년5개월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더니 오늘 돌연히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왼쪽팔목을 바라다보았다. 그는 2년5개월 전 나를 심문할 때 격에 맞지 않게[롤렉스]금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오늘은 싸구려시계로 바꿔 차고 있었다. 이자가 또 무슨 심문을 하려는가 하고 나는 그와 싸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그를 정시하였다.
그는 우리들의 수감생활이 3년이 다 되어가므로 건강을 보러왔다고 말했다.
통역은 안 영사가 맡았다. 심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석방이 머지 않아 실현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날이 밝아 새아침이 올 때마다 오늘은 중은 소식이 있으려나 하고 은근히 석방소식을 기대했으나 감감 무소식인 채 4개월이 덧없이 흘러 7월12일이 되었다.
드디어 [광대뼈]가 부하2명을 데리고 나타나 우리의 교관 3명을 월남인들로부터 격리하여 커다란 방에 이감시켰다.
이날부터 매일 한번씩 목욕도 할 수 있고 일광욕도 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도 아침저녁으로 한[바께쓰]씩 갖다 주었다. 돗자리도 새것을 하나 추가로 주었다. 돌아오는 7윌15일[광대뼈]일행이 다시 와서 3명의 외교관을 심문한 뒤[통칸]에 있는 2명의 한국인이 이곳으로 이감되어 우리와 합류하면 한국외교관과 민간인들은 모두 석방되어 귀국한다고 북 월맹군 출신 남자간호원이 귀띔해 주었다.

<계속>
그림 김송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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