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실존문학의 「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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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장·폴·사르트르」가 70평생 과연 어떤 분야를 걸어 왔는가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여러 가지 측면이 각기 굵게 제시되고 있다.
전후 실존문학의 「카뮈」와 쌍벽을 이루는 『구토』의 작가요, 『존재와 무』로 20세기철학의 새로운 장을 연 철학자요, 사상가, 그리고 숱한 평론 극작품들은 그를 한 마디로 어느 한 분야에 얽매어 생각할 수 없게끔 한다.
1905년 「파리」의 소위 「부르좌」집안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2세 때 아버지를 읽고 할아버지밑에서 엄청난 독서와 글쓰기에만 몰두하며 외롭게 자랐다. 3세매 오른쪽눈의 시력마저 잃으며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속에서 타고난 천재성을 책과 함께 키워온 그를 가리켜 「바다와 흙과 자연을 모르는」사람이라고 비유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또한 이 어릴 때의 「부르좌」적 「문학」의 분위기를 떨쳐버리려는 무언의 반작용이 거의 체질처럼 돼버렸다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엘리트·코스」라는 「앙리4세」와 「라·로셀」교를 거쳐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사르트르」는 1930년 「르·아브르」고교 철학교사를 출발로, 그리고 잇따른 대전의 와중에서 「카프카」를 읽고 「홋살」과 「하이데거」를 공부(1933년 「베를린」불어연구소 근무)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첫 저서 『상상』(l936년)은 이러한 철학적 바탕에서 그 자신 평생의 투쟁으로 삼았던 「고전적 지식인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작. 이어 1938년에 발표된 소설 『구토』는 뒷날 사람들이 실존주의라는 말로 규정했던 그의 철학의 상징처럼 됐다. 이어 『벽』(39년) 『파리떼 』(극본·43년) 『자유의 길』(49년)에서 「노벨」수상작으로까지 꼽혔던 『말』(64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문학을 그 사상의 표현수단이었다고 밝힐 정도로 「철학적인」소설과 연극을 많이 발표했다.
『인간은 자신이 아끼는 가치를 위해 스스로 행동해야한다』고 말해온 「사르트르」는 무신론적실존주의의 창시자로 인간「존재」의 기본을 나와 타인의 「대타관계」에서 분석한 명저 『존재와 무』(43년)틀 발표함으로써 「데카르트」이래 철학에 새로운 문제를 던지고 말았다.
30여편의 소설, 10편의 연극, 10여편의 철학서적을 발표한 「사르트르」는 또한 사상을 의식적으로 행동에 옮겨온 그자신의 정치활동에서도 큰 걸음을 걸었다. 『지식은 스스로를 언제나 뒤집어 고발해야 한다』는 그의 행동은 무수한 변신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하는 「세계양식의 파수꾼」역할을 해왔다. 「알제리」전쟁·「쿠바」혁명·「헝가리」사건·「체코」사태에서 월남전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와 더불어 매로는 공산주의자로, 때로는 반소운동으로 철저한 「사르트르」적 양식을 구축해왔다. 그는 한국전과 한국문인에 대해서까지도 관심과 행동을 이끌어왔을 정도로 세계 정치의 탄압과 폭력에 「파수꾼」으로 참여해 왔다.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50년 동반자「시몬·드·보브와르」여사와는 1929년 「소르본」대학에서 첫 대면, 『그가 아름다왔기 때문에 끌렸었다』면서 지성의 만남을 표현하기도 했다.
「슈바이처」박사와는 외척의 관계인 「사르트르」는 특히 음악을 좋아해 「베토벤」「쇼팽」의 「소나타」를 잘 치고 「바리톤」음성은 자신이 언제나 자랑해왔다. 10여년전부터 그는 눈이 잘 안 보여 거의 집필을 포기하고 지내왔다. <윤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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