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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위충현(魏忠賢)의 길, 그 탐욕의 길을 걷는 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 해,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대학을 거닐다가 동상 하나를 발견하였다. 전신상으로서, 올려다보니 실물 보다 훨씬 크게 조각돼 위압감을 느꼈다. 가까이 다가서니 동상 아래, 설립자 겸 현 이사장의 이름과 짧은 몇 문장이 눈에 뜨였다. 이사장은 한때 재계의 실력자로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인물이다. 버젓이 생존한 인물의 동상이 세워진 것을 보고, 잠시 독재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문득, 이와 유사한 ‘치졸한’ 사례가 떠올라 몇 자 적어본다. 명나라 말기, ‘살아있는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절도사 등이 주축이 돼, 전국 곳곳에 앞 다퉈 사당을 짓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른 바 ‘생사당(生祠堂) 놀음’이다. 이 권력자가 바로 중국 역대 간신 중 몇 손가락 안에 꼽는 환관, 위충현(1568~1627)이다.

그에 관한 일화는 장삼이사도 알정도로 보편적인 얘깃거리가 되었다. 중국을 ‘빛낸’ 10대 간신에도 이름을 올렸다.《역대 인물 전기》에도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명대 사극에도 위충현은 빠짐없이 등장하여 악명을 날렸다. 위충현 역을 맡은 배우의 간교한 용모와 음흉한 미소가 뇌리를 맴돈다.

《명사ㆍ위충현 전》을 비롯하여 김영수ㆍ김경원이 엮은《간신열전, *원제 변간신론辨奸臣論》, 자원훙(賈文紅)의《중국 명인 대전 *성연진이『중국인물열전』으로 번역 소개) 》, 김영수의《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등에 그에 삶이 수록돼 있다.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물, 대담 프로, 드라마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의 악취 나는 삶을 더듬어보자.

그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환관이 되기 이전에 결혼하여 처자식이 있었으며, 일정한 직업 없이 시장 바닥을 전전한 무뢰배였다. 도박을 좋아하여 몇 푼 안남은 가산마저 탕진하였다. 도박 빚에 몰려 인생의 출로를 모색하던 중, 결국 22살에 스스로 남성을 거세하여 입궁하였다. 이때부터 ‘출세’, ‘권력’이란 글자가 그의 눈에 아른거렸을 것이다.

그는 남다른 장점을 지녔다. 당당한 풍채, 과묵함, 배짱, 결단력, 순발력, 사교력, 야심 등을 두루 갖췄다. 그는 먼저 황실 측근의 두 환관과 한 여인 등, 세 인물에게 공을 들였다. 위조(魏朝), 왕안(王安), 객인월(客印月, 객 씨로 호칭) 등이 그들이다.

태자 주상락(朱常洛)을 모셨던 위조와는 의형제 관계를 맺어 그를 친형처럼 받들었다. 황실에 신망이 두터웠던 원로 환관, 왕안에 접근하여 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또 주유교(朱由校)를 젖을 먹여 길렀던 객인월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환관들도 성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며, 성욕이 잠재했다고 전해진다.

주유교는 ‘길러준 엄마’인 객 씨를 생모 이상으로 잘 따랐다. 그는 16세에 황제로 등극하였고 그가 바로 희종(熹宗)이다. 이에 따라 객인월도 봉성부인(奉聖夫人)의 지위에 올랐다. 내연녀 객 씨의 도움으로, 위충현도 병필태감(秉筆太監, 황제의 비서실장)이 됐다. 문맹이었던 위충현에게 과분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황제 대신 붓을 놀려, 황제의 유지를 왜곡, 위조, 변조함으로써 황제의 눈과 귀를 가렸다. 희종은 황제라기보다는 목장(木匠)의 기질이 다분하였다. 목공예에 심취했던 희종은 23세의 나이로 붕어하기까지, 7년 재위 기간을 목공예로 세월을 보냈다. 혼군의 무능과 간신의 발호(跋扈)는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내를 건넌 뒤 다리를 부숴버린다(꿔흐어차이치아오?河??).’는 속담이 있다. 위충현은 의형이자, 객 씨와 삼각관계에 있던 위조, 3대를 거친 환관, 왕안을 제거하였다.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악으로 갚은 것이다.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위충현은 방방곡곡에 거미줄처럼 사조직, 비밀정보기구를 만들어, 집권세력인 동림당(東林黨)과 맞섰다. 잠시 동림당의 유래를 알아보자. 만력제 때 파직당한 고헌성(高憲成)이 고향 우씨(無錫)로 내려가 그 곳에서 동림서원을 열었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조정에서 대거 활약하였다. 이들이 중심이 돼 희종을 옹립하였다. 집권세력이 된 이들을 동림당이라 하였다. 지식인 중심의 동림당은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포용력이 부족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내쳤다.

동림당에 배척당한 세력들이 위충현의 환관당(엄당?黨 *엄은 ‘거세’의 의미)에 가세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간신들이 세력을 불릴 때 쓰는 수법은 뻔하다. 한 자리 베풀어 수하로 삼는 방식이다. 예부상서 고병겸(顧秉謙)도 위충현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그의 아첨은 ‘예술의 경지’에 달했다.

“이 몸이 어르신의 양아들이 되고 싶었으나, 어르신께서 허옇게 수염 난 아들을 싫어하실까 봐 제 아들을 손자로 삼으셨으면 합니다(김영수,《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2009, 추수밭, 308).”

이 말을 듣고 흡족한 위충현은 내각의 수반 격인, 수보(首補)에 고병겸을 앉혔다. 아울러, 동창(東廠), 서창(西廠), 금의위(錦衣衛) 등 비밀경찰조직을 장악하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들 조직은 환관과 심복으로 채워졌다. 사조직 가운데 특히, 문관들로 구성된 오호(五虎), 무관들로 구성된 오표(五彪) 등 열 사람은 위충현의 양아들 또는 심복 중의 심복들이었다. 이들은 이름에 걸맞게 맹수와 같은 잔인성을 보여 궁중을 피로 물들였다. 명대는 환관에 의한 특무정치, 공포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위충현이 등장하자 절정에 달했다.

선비풍의 인물들로 구성된 동림당은 애초부터 교활한 환관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최대 정적이었던 동림당을 제거함으로써 ‘위충현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였다.

황제를 칭송할 때 “완쑤이! 완쑤이! 완완쑤이!(萬歲! 萬歲! 萬萬歲!)”라고 외친다. 아부하는 자들이 위충현을 “지우첸! 지우첸! 지우첸쑤이!(九千! 九千! 九千歲!)”로 받들었다. 항주의 절경, 서호(西湖)를 비롯하여 전국의 명소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앞서 언급한 산자를 위한 사당, 즉 ‘생사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30여 년 전, 시정의 건달이 어느 날 살아있는 ‘신’으로 둔갑한 것이다. ‘위공사(魏公祠)’의 건립 여부는 곧 그에 대한 충성을 가늠하는 잣대였다.

희종이 죽자 그의 7년 영화도 막을 내렸다. 뒤이어 등장한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에 의해 위충현은 축출됐고,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시신은 난도질당했고, 그의 목은 저잣거리에 걸렸다. 두 번 죽은 것이다. 17년 후인 1644년, 농민군의 봉기, 만주군의 침공으로 숭정제는 목을 매 자살하였다. 이로써 폭군이자 간군(奸君), 주원장이 세운 명 왕조는 16대, 270여 년을 존속하다 멸망하였다.

위충현이 걸어 온 길은 배신의 길, 탐욕의 길, 파멸의 길이었다. 그가 죽자 악랄한 객 씨도 ‘세탁소(洗衣局)’로 쫓겨나 거기서 맞아 죽었다. 지금도 ‘위충현의 길’을 걷다 나락으로 떨어진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뇌물사건에 연루돼 자살하는 공직자들의 비보가 들린다. 한강 다리에 안전망을 쳐놓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하루 종일 교육부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자 청문회를 지켜보았다. 청문위원들은 그를 ‘학자의 탈을 쓴 주식전문가’로 몰아 세웠다. 그러자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연구와 강의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주식을 해도 무방하다고 항변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문위원들은 하나같이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청문회를 ‘낭만적’으로 생각했다.”는 코미디 같은 ‘명언’을 남기고 쓸쓸히 사라졌다. 한 편의 ‘허무 개그’를 보는 것 같아 두고두고 입맛이 씁쓸하다. 그는 학자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왜곡된 길을 걷다 영원히 낙인찍히고 말았다. 탈선(脫線)한 교수의 비참한 말로다.

어느 날, 자주 부딪혔던 미혼의 한 엘리트 장교에게 물었다. “생도 때 배운 대로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 그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한다. “정의의 길은 너무나 험난해서 싫어요. 무사안일한 편안한 길이 좋아요.” 재차 물었다. “배우자감으로 어떤 여자가 좋으냐?” 그의 답이 가관이다.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돈 없는 여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할 말을 잃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유병언의 백골 사체 발견 뉴스, 감사원 김 모 감사관이 5억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는 보도, 공군 전 현직 간부들이 결탁하여 군사기밀을 민간업자에게 넘겼다는 서글픈 소식이 들린다. 기차는 철길이, 학자는 학자의 길이, 공직자는 공직자의 길이, 군인은 군인의 길이 바른 길인지를 왜 깨닫지 못하는가. 왜 굳이 ‘험난한’ 탐욕의 길을 걸어 파멸을 자초 하는가.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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