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은 끝맺음이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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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류역사가 흘러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 사회가 어느 한 고비에 이르고 보면 내적 및 외적으로 여러 가지 불합리스런 요소가 작용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문학적으로「데카당스」가 생기는 일은 많다.
이런 상황을 예민하게 살펴보면서 경종을 울리고 적신호를 쳐들어 보이는 사람은 오랜 동안 위대한 소수 인재들이었다. 「소크라테스」·세례「요한」·「볼테르」·「카를·마르크스」같은 문호·철인·학자 등을 선각자로 우선 꼽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가 널리 보급돼있는 근대에 이르러선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한 사회 안에 있어서 부정·불의·부조리가 번식하면서 기세를 떨치는 경우 이런 상황에 대해 가장 먼저, 또 가장 예민하게 불만과 혐오를 느끼는 (현상을 분석하거나 설명하기에 앞서)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젊은 학생층이다.
근대 우리사회에서 정치·사회 내지 외교문제에 대해서까지 불평·불만·울분을 느끼면서 성토하기도, 또 「데모」에 나서기도 한 것은 거의 학생들이었다.
3·1운동 때의 일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후 광주 학생운동·신의주 학생사건, 그리고 이 정권 말기를 통해서 계속 벌어진 「데모」가 4·19 의거로써 정점을 이룩한 거나 또 그후 한일국교 정상화문제를 둘러싸고 학생들이 큰길에 뛰어나온 것은 모두가 이런 성격의 것들이다.
이런 유의 학생운동은 l940년대 중공에서도 볼 수 있었고 또 1960년대를 통해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있어서도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그러면 어느 사회에 있어서든 염려되고 불행스런 사회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째서 학생층이 대개 그 선봉, 혹은 목탁 구실을 하게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한 한가지 사실 때문이라고 본다. 즉 학생시절을 사는 그 젊음의 특성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젊음은 맑은 양식과 날카로운 의리감과 깊은 동정심이 가슴속에 가득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특성은 어디서든 공정성이 무시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사회악이 드러나는 때라면 그들의 의분과 정의감은 함성으로 혹은 「데모」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고 보면 사회의 기존세력은 이런 적신호와 경종은 사회 안의 그 어떤 결합을 지적하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될 수도 있다.
젊은이들이 서두르는 운동이 기존 사회로 하여금 이렇듯이 새로운 자세를 가지게 하는 성과를 얻게 된다면 이것은 새로운 원칙과 도덕적「이슈」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면에 있어서 l백%에 가까운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학생운동의 의의와 목표는 바로 이선과 이점에 두어야 한다고 나 스스로가 평소에 믿고있는 것이다.
이제 이점 이선이라고 하면 그이상의 활동과 더불어는 칼로 밴 듯한 명확한 한계를 짓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예서부터는 하나의 다른 영계가 전개돼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정책과 방법을 마련하는 영역이 그것이다.
나는 바로 이점에 대해 지난날 한일국교 정상화문제가 등장했을 때에 볼 수 있었던 한가지 사실을 기억한다.
이 문제는 맨 처음 젊은 층의 항거에 봉착했다. 그러나 거의 수년간에 걸쳤던 일진일퇴식 논의와 투쟁은 결국 정상화를 적어도 원칙적으로 인정하게 됐다.
다시 말하면 이것으로써 도덕적 또 원칙 면에 있어서 조정을 이룩한 셈이다.
그 이후에 다루어야하는 문제는 정녕 정책과 방법과 숫자계산이 포함되는 영역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든다면 배상금의 액수가 7억「달러」가 아니라 20억 「달러」가 돼야하느니, 어로선의 거리는 20 해리쯤은 돼야하느니 등 모두 전문분야의 문제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그 운동범위를 넘어 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 4·19학생의거는 우리 나라 민주주의 발전 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한 장을 썼다.
그런데 여기 애석한 하나의 각주를 붙인다면 그들이 계속해서 정책과 정치의 영역까지 깊이 들어선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점이다.
학생운동은 그 성격상 어느 한계, 어느 시각에 이르러서는 그 정열의「템포」를 늦추거나 멈추거나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글에 덧붙여 오늘 우리 종교인들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 간단한 소감을 적어본다.
오늘 우리 나라의 불교나 기독교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현실세계를 경시하면서 내세의 영생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히 기독교에서 쓰는 말 그대로 사회복음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즉 많은 인간이 시달리고 있는 육체적 질환을 비롯해서 굶주림·미신, 그리고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부정과 불의, 또 그 비리의 상황을 교정하고 제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런고로 모든 사회악 문제에 대한 종교인들의 태도와 반응은 대체로 학생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양식의 발로라고 본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얼마의 차이가 있다.
세대의 차이, 그리고 신분의 차이가 그것이다. 세대의 차이는 나잇살을 좀 더 먹은 세대가 정열 면에 있어서 감도의 경향을 보이면서 사고력이 보다 크게 작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분의 차이는 복잡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종교인들은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전애와 자비심을 설하고 교하고 하는 사명이행과 아울러 사회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서 정책과 방안, 혹은「프로그램」을 설정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사상과 이상을 우리 사회에서 구현시키는 첩경으로서 정치무대를 마련하는 것도 가능하다.
학생이건 종교인이건, 또 그 밖의 모든 국민들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사회적으로 허다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이 과정에 있어서 각각 그 처지와 신분과 능력에 알맞은, 즉 지나치지도, 못 미치지도 않은 범위와 한계 안에서 국가와 민족적 번영을 위해서 지성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광영스러운 의무요, 또 특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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