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부시의 전쟁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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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금은 천하무적처럼 보이지만 1년7개월 전 9.11테러 때 미국 부시 대통령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날 저녁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은닉한 세력을 제거하겠다"는 단호한 내용의 대국민 연설을 할 때조차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당시 상황을 "부시는 구체적인 사실에 관심이 없고, 동떨어지고 냉담하며 무지하기까지 한 약체인물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맞서야 했다"('부시는 전쟁 중'에서)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부시의 공포는 이해할 만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직후, 플로리다주에서 워싱턴으로 날아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그는 공격자들의 "다음 목표는 천사"라는 통화내용이 담긴 감청보고를 받았다. '천사'는 대통령 전용기의 암호명이다.

부시는 기수를 은신처로 돌려야 했다. 보이지 않는 적들을 교란하기 위해 루이지애나주로 갔다가 90분 만에 다시 네브래스카주 오펏 공군기지로 몸을 감췄다.

그는 그날 밤 워싱턴에 돌아와서도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출현하는 바람에 반바지 차림으로 황급하게 백악관 지하벙커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부시 대통령은 자부심 강한 미국 역사에서 외국의 군사세력으로부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살해 위협을 느낀 거의 유일한 대통령인 것 같다.

'부시의 전쟁'은 전쟁 상대국의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전의 전쟁들과 비교된다. 과거 전쟁의 목표는 상대방의 군사력 파괴, 침략의지 분쇄, 영토나 경제적 이익추구, 체제수호 등 여러 차원의 복합적인 것이었다.

지도자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집중 폭격하거나, 그의 생포 혹은 사살을 중시하는 부시의 독특한 전쟁관은 9.11체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 제거라는 단순명쾌한 개념은 부시의 단순한 성격과도 맞아떨어진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라크 전쟁 초반까지 50여일간 잠적했으며 그중 상당기간 백두산 삼지연이라는 은신처에 머물렀다는 보도가 있었다. 金위원장은 부시가 9.11때 겪은 것과 비슷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지도자 제거라는 부시의 새로운 전쟁개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쟁은 군통수권자 간의 체험과 철학, 기세 싸움이기도 하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