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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아름다운 일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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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호 24면

‘호주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 프리실라가 개막했다. 길이 10m·무게 8.5t의 실물크기 버스 세트가 3만 개의 핫핑크빛 LED조명을 달고 무대 위를 누비고, 총천연색 의상 500여 벌과 가발 60여 개, 신발 150켤레가 동원되는 블록버스터다. 1994년 칸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동명 영화를 무대로 옮긴 ‘무비컬’이자 80년대 추억의 팝송을 대거 투입한 ‘주크박스 뮤지컬’. 요즘 뮤지컬 산업의 주요 트렌드 두 가지를 절묘하게 빚어내 2006년 초연 이래 “‘맘마미아!’ 이후 최고의 쇼”라 극찬받으며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 이탈리아, 스웨덴 등 세계를 순항중인 작품이다.

뮤지컬 ‘프리실라’ 7월 8일~9월 28일 LG아트센터

웨더걸스의 ‘It’s Raining Man’, 마돈나의 ‘Like a Virgin’,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등 흥겨운 25곡의 디스코 음악이 세대를 넘어 모든 관객을 들썩이게 만드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무대다.

시드니의 게이가수 틱은 별거 중인 아내로부터 시골마을 앨리스 스프링스의 카지노 쇼 출연 제의를 받고 왕년의 드랙퀸 스타인 트랜스젠더 버나뎃과 트러블 메이커지만 늘 당당한 신세대 게이 아담과 함께 길을 떠난다. 시드니에서 앨리스 스프링스까지 2876km에 이르는 긴 여정을 함께 하는 고물버스의 이름이 ‘프리실라’다.

트렌스젠더와 게이를 주인공 삼아 성 소수자들의 애환을 그린 또 하나의 뮤지컬이지만, ‘헤드윅’ ‘라카지’등 같은 계보의 전작들보다 훌쩍 진화한 형태다. 이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세상을 향한 울분 같은 것은 없다. 세상이 뭐라고 손가락질하건 툭툭 털고 자기네 인생을 산다. 성 소수자라고 해서 다 같이 뻔한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저마다 디테일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한때 여자와 결혼해 낳은 아들과의 첫대면을 앞둔 틱, 노년에 배우자를 잃고 상실감에 빠진 버나뎃, 그리고 부모에게 버려진 상처를 뒤로 한 채 세상의 중심에 나서길 원하는 아담은 취향도 성격도 제각각이다. 긴 여정 속에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각자의 문제를 극복해 간다. 저들의 문제가 꼭 특별한 소수의 그것은 아니다. ‘성소수자’란 은유일 뿐,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지내온 지구촌 사람들이 함께 살기가 얼마나 어렵고도 또한 아름다운 일인지에 대한 노래인 것이다.

버나뎃 역을 멋지게 보여준 조성하

강도 높은 퍼포먼스와 연기는 물론 짙은 메이크업과 여장, 과감한 노출까지 불사하는 ‘드랙퀸’ 역할에 몸을 던진 배우들의 투혼이 볼 만하다. 특히 노년의 트렌스젠더 ‘버나뎃’역을 감칠맛 나게 소화한 조성하에겐 기립박수가 아깝지 않다. TV와 영화에서 선굵은 연기를 보여줬던 그의 ‘귀여운 할머니’ 변신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이클 리·김다현·조권·이지훈·김호영 등 재기 넘치는 스타들이 총출동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지만 너무 가볍고 번쩍번쩍해 자칫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대에 든든히 무게 중심을 잡아줬다. 종종 뮤지컬 무대에 나들이 나와 감초 역할을 했던 중견배우들의 존재감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연기력은 단연 이 무대의 ‘갑’이었다.

아쉬움도 있었다. 귀에 익은 디스코 메들리는 더없이 흥겨웠지만 극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드랙퀸쇼를 재현하다 보니 주요 곡 대부분을 천장에 매달린 3명의 디바가 소화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이 립싱크를 연출하는 광경도 낯설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열창에 환호하고 싶은 일념으로 공연장을 찾는 팬들로선 적잖이 실망스러운 요소다.

‘쇼는 쇼일 뿐’이었지만 각각의 쇼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있었다. 2막 끝 부분, 로드무비의 종착역이자 극의 귀결점인 카지노 쇼는 그 절정이다. 주인공 3명만 등장하는 무대에 모든 앙상블을 총동원해 ‘15초 의상체인징 신공’을 구사하며 압축해 보여주는 드랙퀸 쇼의 진수에, 실제 이런 쇼를 볼 수 있다면 호주 여행길에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무릎을 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나 호주에서 왔어요’ ‘호주로 놀러오세요’라고 유혹하는 은근한 손짓이랄까. 관객을 제일 먼저 맞는 것도 막에 그려진 호주 지도다. 시드니부터 앨리스 스프링스까지, 반짝이는 꿈의 버스를 타고 호주 구석구석을 누비는 설레는 여정에 캥거루, 코알라 등 호주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총출동하고, 급기야 세 주인공이 입은 드레스가 나란히 서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되는 커튼콜까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물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 무대는 브로드웨이도 웨스트엔드도 아닌 호주 뮤지컬이며, 호주에 오면 이런 볼거리와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우리만의 정체성을 외치며 외국인들은 관심도 없는 민족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보다 훨씬 세련된 마케팅 아닌가. 세계 진출을 노리는 토종 콘텐트들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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