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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윤의 백기투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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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역대 금융위원장이 곳간 속 보물처럼 지켜온 게 있다. LTV(담보인정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다.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고 둘을 이란성 쌍둥이쯤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성격은 좀 다르다. LTV는 빌려주는 은행 쪽에, DTI는 빌리는 개인 쪽에 초점을 더 맞춘다. 굳이 따지자면 LTV는 은행 부실을, DTI는 국민 개인이 부실해지는 걸 막는 안전 장치라 할 수 있다. 이걸 쉽게 풀어줬다가는 은행 또는 국민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기 십상이다. 금융위원장들이 대를 이어 LTV·DTI의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관리했어도 이미 우리 가계 빚은 1000조원을 넘어섰다.

 지금까지는 금융위원장들의 LTV·DTI 방어전략이 성공적이었다. 공격은 주로 국토건설부 쪽에서 했다. 명분은 부동산 경기 활성화였다. 하지만 “가계빚 1000조원을 어떻게 감당할 거냐” “부동산 조금 살리려다 나라 망칠 거냐”는 금융위 쪽 반발에 번번이 막혔다. 지난 정부의 정종환 장관은 4대 강을 책임진 실세요 정권 최장수 장관이었지만 역시 김석동 금융위원장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김석동은 “LTV·DTI를 풀어줄 테니 가계빚 막을 다른 대안을 가지고 오라”고 버텼다.

 이런 전통은 신제윤 현 금융위원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2008년 이후 지난달까지 그는 줄곧 “LTV·DTI는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가계부채 관련 정책이며, 이를 완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해 왔다. 이런 신념은 올 초 박근혜 정부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내놓을 때도 지켜졌다. 당초 청와대는 LTV·DTI 규제 완화를 3개년 계획에 포함하려 했지만 신 위원장은 “직(職)을 걸고 반대한다”며 막아냈다. 당시 논리도 명료했다. “LTV·DTI는 매크로(거시) 정책이 아니라 금융 건전성 정책이다”며 “부동산 경기 활성화 수단으로 동원돼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나는 신제윤의 이런 결기에 감탄했으며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내정 직후부터 여러 차례 LTV·DTI 규제 완화를 거론했지만, 나는 내심 반신반의였다. 신제윤을 믿었기 때문이다. 직을 걸고 청와대의 공세를 막아낸 그다. 그런 결기가 몇 달 만에 어디 가랴. 아무리 실세 최경환의 창이라지만 신제윤의 방패를 쉽게 뚫지는 못하리라. 그런데 웬걸, 그런 기대는 요 며칠 새 슬그머니 사라졌다. 신제윤은 지난주 국회에서 “(LTV·DTI 완화가) 주택 정책이 아니라 매크로 정책의 일환이라면 검토하겠다”고 했다. “최경환 부총리가 취임하면 협의를 통해 금융안정을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LTV·DTI의 합리적 조정 방안을 마련해 보겠다”고도 했다. 전제를 많이 깔기는 했지만 몇 달 전 자기 논리와 주장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결과는 곧 나타났다. 아직 공식 발표는 안 났지만 ‘LTV는 70%로 완화, DTI 완화도 검토 중’이란 게 정부 쪽 얘기다. 신제윤의 금융위가 “더는 물러설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틴다는 후문이지만 LTV에서 물러선 만큼 DTI도 시간 문제다. LTV·DTI가 무슨 성역은 아니다. 금과옥조도 시대 상황이 바뀌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몇 달 새 상황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었겠나. 여전히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 최악의 뇌관이며, LTV·DTI 완화가 부동산을 살릴 것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돈을 빌려 집을 사기보다 가계·사업자금으로 쓰는 사람이 50%에 달한다. 설령 빚으로 집을 샀다 치자. ‘빚으로 쌓은 주택’이 얼마나 가겠는가. 바뀐 것이라곤 경제 사령탑, 사람이 바뀐 것뿐이다. 그러니 애꿎은 LTV·DTI를 참수해 최경환 경제팀이 힘자랑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신제윤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부디 그의 고민이 어떻게 하면 신임 부총리와 손 맞춰 자리를 보전하느냐는 쪽은 아니길 바란다. 직을 던져 LTV·DTI를 지키겠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다. 상황 따라 바뀔 수는 있지만, 사람 따라 바뀌는 건 소신이 아니다. 처세술일 뿐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