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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지을 이 없어 무너지는 구들장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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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세계중요농업유산인 청산도 구들장 논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난 12일 청산면사무소 직원 김황호(36)씨가 훼손된 통수로(通水路)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지정한 국내 첫 세계중요농업유산인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 ‘구들장논’이 방치돼 허물어져가고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어 수풀이 우거지고,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과 이따금씩 내리는 폭우 때문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논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청산도 부흥리 언덕 중턱. 흔적만 남은 계단식 논에 어른 무릎까지 자란 잡초가 가득하다. 칡넝쿨이 박힌 곳도 있다. 아랫 논엔 돌덩이가 흩어져 있다. 아래와 윗 논 사이 쌓아올린 석축이 군데군데 무너져 돌멩이가 굴러내린 것이다.

주민 정신자(67·여)씨는 “농사짓기는커녕 돌보는 사람조차 없다보니 구들장논이 이 모양이 됐다”고 말했다.

 청산도 구들장논 면적은 약 7만5000㎡(약 2만2700평) 규모다. 언덕배기인 부흥리·양지리·상서리 일대에 있다. 이 중 거의 절반인 3만5000㎡는 농사를 짓지 않아 황폐화됐다. 어느 농촌에서든 나타나는 고령화와 이농 현상이 그 이유다. 청산도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 그랬다. 농사에서 손을 뗀 어르신이나 섬을 떠난 주민들 뒤를 이을 사람이 외지에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주민이 이어받기도 쉽지 않다. 평지에 반듯하게 난 논이 아니어서 기계로 농사를 짓기 어렵다. 요즘은 다 기계로 하는 모내기와 추수를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방치된 논이 늘었다.

 멧돼지도 골칫거리다. 서울 송파구 정도인 33㎢면적에서 지난해에만 멧돼지 57마리가 잡혔다. 이렇게 잡아도 늘 말썽이다. 툭 하면 산 아래로 내려와 논·밭을 파헤치고 농작물을 먹어치운다. 멧돼지들이 슬쩍 논두렁을 밟으면, 돌보지 않은 구들장논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주민들은 잡아도 잡아도 멧돼지가 줄지 않는 것에 대해 “생일도 등 10㎞쯤 떨어진 인근 섬에서 먹이를 찾아 조류를 타고 헤엄쳐 건너오는 것 같다”고 하고 있다. 기승을 부리는 멧돼지는 그렇잖아도 수확이 시원치않은 구들장논에서 농부들이 아예 손을 떼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청산도에서는 2010년 430세대에 달했던 논농사 가구가 지난해 330가구로 줄었다.

 돌보는 이들이 없어 국제기구가 지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이 훼손되면 청산도와 전남 완도군은 물론 나라 체면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일단 완도군이 머리를 짜냈다. 한 구좌당 연회비 3만원을 내는 ‘구들장논 오너 제도’를 만들어 모은 돈으로 누군가가 농사를 짓게 하자는 것이었다. 오너에게는 농산물을 소량 보내주고, 청산도 여행 할인 혜택 등을 주기로 했다. 완도군은 이 같은 제도를 지난 4월 시작했으나 아직 회원은 청산도 출신 등 100여 명에 불과하다. 안봉일(52) 청산면장은 “청산도 귀농자에 대한 지원을 정부 등에 요청해 논농사를 늘려 보겠다”고 말했다.

청산도=최경호 기자

◆구들장논=외형은 국내 곳곳에서 보는 계단식 논 형태다. 바닥에 구들장처럼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부은 뒤 벼를 심는 게 다르다. 청산도 흙에는 모래 성분이 많아 물을 붓기만 하면 빠져나가는 바람에 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이런 구들장 논이다. 언제,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특수성을 인정해 올 4월 FAO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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