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꾀 가진 괴물 2년차 징크스 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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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클레이튼 커쇼(26)와 잭 그레인키(31)의 그늘에 가려 있다. 그러나 그를 FA(자유계약선수) 시장에 내놓는다면 서로 데려가려 할 것이다."

류현진(27·LA 다저스)의 경기 총평을 부탁하는 취재진에게 돈 매팅리(53) 다저스 감독은 대뜸 이런 얘기를 꺼냈다. 그는 "류현진이 언어 문제로 커쇼나 그레인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지만 야구계는 그의 능력을 다 안다"고 덧붙였다.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들과 류현진을 함께 거론한 것은 다저스 감독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류현진은 14일(한국시간) LA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샌디에이고와의 홈 경기에서 6이닝 동안 2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 1-0 승리를 이끌었다. 앞선 세 경기에서 2패만 당했던 그는 올스타전 휴식기 이전에 10승(5패) 고지에 오르며 빅리그 데뷔 후 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렸다.

투구수 92개를 기록한 류현진은 직구(포심패스트볼) 31개, 커브 21개, 서클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20개씩 던졌다. 이 가운데 가장 위력을 발휘한 건 슬라이더였다. 커쇼는 경기 전 류현진에게 "샌디에이고를 상대할 때는 슬라이더가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포수 A J 엘리스까지 불러 미팅을 했고 슬라이더 활용에 대해 논의했다. 류현진이 잡은 삼진 10개 가운데 6개가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삼은 것이었다. 오른손 타자들 몸쪽으로 시속 140㎞에 가까운 슬라이더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야시엘 푸이그가 6회 말 1타점 적시타를 때려 리드를 잡자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을 내렸다. 불펜이 한 점 차 승리를 지킨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54승43패)로 전반기를 마쳤다. 커쇼(11승2패)·그레인키(11승5패)에 이어 류현진까지 10승을 달성한 다저스는 2010년 뉴욕 양키스 이후 4년 만에 투수 3명이 전반기 10승을 거둔 팀이 됐다.

류현진은 지난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14승8패를 기록했다. 나이가 적든 많든 빅리그 루키는 두 번째 시즌을 꽤 힘들어 한다. 류현진도 지난해 체력을 많이 쓴 데다, 장단점이 모두 노출됐기 때문에 올해는 고전할 거라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류현진은 능구렁이처럼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하나씩 넘었다. '2년생 징크스'를 걱정할 필요 없이 그는 '2년생 베테랑'이 돼 있었다. 3월 24일 호주 개막시리즈(애리조나전 5이닝 무실점)에서 승리한 류현진은 분위기를 잘 타다 4월 말 왼쪽 어깨 부상(견갑골 염증)을 입고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힘든 일정이 그를 지치게 했지만 5월 22일 뉴욕 메츠전에 돌아와 3연승을 달렸다. 한 달 가까운 공백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던졌다. 5월 27일 신시내티전에서는 7이닝까지 퍼펙트 피칭을 이어가다 8회 기록이 깨졌다.

이 과정에서 류현진의 피칭 패턴이 달라졌다. 그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에 당했던 타자들이 배팅 타이밍을 늦춰 체인지업을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류현진은 상황에 따라 느린 커브와 빠른 슬라이더로 세컨드 피치를 바꿔가며 상대를 교란했다.

날이 더워지며 체력이 떨어진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류현진은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최고 시속 153㎞의 강속구를 뿌렸다. 나흘 휴식 후 등판에도 순조롭게 적응했고, 지난해 괴롭혔던 '원정 징크스'는 찾아볼 수 없다. 올 시즌 원정 기록(6승2패·평균자책점2.75)이 홈 성적(4승3패·4.13)보다 좋다.

지난해 류현진은 8승으로 전반기를 마쳤고, 후반기 세 번째 등판인 8월 3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10승에 성공했다. '2년생 베테랑'이 된 올해는 한층 노련하게 승리를 쌓아가고 있다. 후반기 13번 정도 등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7~8승 정도를 추가할 수 있다.

청바지 차림으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류현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10승을 거두고 전반기를 마쳐 너무 좋다. 후반기에는 (현재 3.44인) 평균자책점을 3.10 이하로 낮추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매팅리 감독이 커쇼·그레인키와 비교한 것에 대해) 그들은 모두 좋은 투수들이다. 나는 한 번씩 무너지는 약점이 있다. 그들 수준에 이르려면 공의 스피드가 꾸준해야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봉화식 LA중앙일보 기자, 김식 기자 bong@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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