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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김설진을 왜 몰라봤을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울컥 했다. 현대무용가 김설진(34)의 춤을 보고서다. 그가 4일 tvN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9’에 나와 보여준 움직임은 경이로왔다. 음악과 착 맞아 떨어지는 안무와 고난도 테크닉은 그럴 수 있다 쳐도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섬세한 감성 표현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숨이 막혀온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

물론 클로즈업과 슬로우 장면, 편집과 심사위원 리액션 등 다양한 영상 기법이 효과를 극대화시켰을 수 있다. 그래도 나로선 음악이나 노래가 아닌 춤으로 이런 감흥을 받은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춤을 보고도 좋았긴 해도 콧끝이 시큰하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시각에 호소해야 하는 춤이 정서를 건드리는 건 어렵다. 한편으론 김설진의 춤에 영혼이 서려 있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김설진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며칠간 유지했다. ‘별에서 온 댄서’ ‘갓(God)설진’ 등의 별명도 생겼다. 이런 호들갑에 그는 꽤 낯설어 했다. “대중에게 알리려 몇 년이 걸려도 안 됐던 일이 단 몇 회 방송으로 이뤄진 게 신기하지만 한편으론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이력은 독특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때 스트리트 댄스를 익혔으며 고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해서는 코요테·엄정화 등의 백댄서를 했다. 현대무용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건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해 안무가 안성수를 만난 후부터였다고 한다. 안씨는 “착하고 성실한 제자”로 김설진을 기억했다. 이후 2008년 벨기에 피핑톰무용단으로 건너가, 거기서 연극·판토마임과 접목된 현대무용을 익히며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지금의 연기력·표현력도 이때 형성됐을 듯싶다.

하지만 그의 춤을 보며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건 솔직히 따로 있었다. 그건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지난 9년 간 공연 담당 기자로 일하는 동안 유명하고 폼나는 무용은 죄다 보러 다니면서도, 어찌 김설진이라는 무용수의 이름을 몰랐었나. 그게 부끄러웠다. 최근 외국에 있었다는 걸 핑계 삼을 수 있겠지만, 그가 뮤지컬 배우였어도 그랬을까. 해외 발레단에 있었어도 몰랐을까. 아니었을 게다. 인기없는 현대무용수라서 외면했던 거다. 어차피 대중의 관심이 없다는 걸 위안 삼으며, 보석처럼 숨어 있는 무용수를 굳이 발굴해 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온 것이었다.

최근 대한민국은 총체적인 인사 난맥에 꽉 막혀 있다. 총리도, 장관도, 비서실장도 마땅히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푸념이다. 재?보궐 선거엔 내세울 만한 후보가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연 그럴까. 혹 임명권자가, 공천권을 쥔 자가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런 것은 아닐지. 내려 놓으면 많은 게 보일 텐데 말이다. 무명의 무용수가 매스컴을 타며 대중문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것을 보며, 혹시 국내 정·관계에도 또다른 김설진이 묻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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