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배부른 자의 여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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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호 30면

비 오는 날 칼국수 집은 만원이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파전과 막걸리, 삼치구이와 소주 그리고 국수. 왜 비가 오면 그런 음식이 생각나는 것일까?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 오는 아침 출근길에 빗방울들이 몰려다녔다. 박정대의 시 ‘거대한 물고기’의 한 구절처럼 “生이 골목마다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런 날 “삼치 한 점 발라 비 내리는 골목 / 비에 젖은 고양이에게나 내어주고 / 나는 빈속에 소주를 마신다”면 좋겠지만 회사원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점심때 칼국수 집에 간다.

강남에 있는 회사원은 모두 칼국수를 먹으러 오는 것 같다. 시위대처럼 무리 지어 끝없이 몰려온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 우리는 창가 쪽에 앉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이 있지만 누구나 배가 부르면 돼지처럼 되고 배가 고프면 소크라테스처럼 생각이 많아지는 것 아닐까?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식당 안을 둘러본다. 손님들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손님이 나간 테이블에는 다 먹은 그릇들이 그대로 있다. 사장도 나서고 일하는 이들이 바쁘게 몸을 움직여도 몰려오는 손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 우왕좌왕, 허둥지둥, 엉망이다.

우리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은 십 분째 빈 테이블을 보며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 여기로 오자고 한 사람은 누구였나? 박 대리였을까? 김 부장이었나?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원망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비가 와도, 비가 칼국수 면발처럼 내린다 해도 다시는.

우리는 벨을 누른다. 벨을 누르면 전광판에 테이블 번호가 표시된다.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바빠 전광판도 쳐다보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할 일을 계속 한다. 그 태도가 우리를 도발한다. 우리는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누른다. 언제 시켰는데 아직도 안 나오는 거냐! 일손이 모자라면 종업원을 더 늘리고 시스템을 개선해야 할 것 아닌가! 비 올 때마다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소리라도 치고 싶은데 끝내 불통이다. 식당 안에는 손님들이 누르는 불통의 벨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사십 분이 지나고 마침내 우리 자리에도 칼국수가 나왔다. 애호박과 어슷하게 채를 썬 파와 다홍고추가 고명으로 올려진 칼국수. 닭고기로 육수를 낸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을 들이키니 속이 좀 풀린다. 창 밖을 보니 비가 면발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퍼붓는 비를 보면서 들이키는 국물 맛이 끝내준다.

배에 음식이 들어가니 강퍅해진 마음도 어느새 너그러워진다. 이해심이 생긴다. 초인적인 공감능력이 생긴다. 손님이 많으면 음식 늦어지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벨 소리도 그렇다. 가 봐야 뻔하다. “언제 시켰는데 아직도 안 나오는 거냐!” 겨우 그 소리나 하려고 벨을 누르는 것일 텐데 야단맞을 시간에 한 곳이라도 더 음식을 나르고 손님이 나간 자리를 치워야 한다.

5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에게 칼국수 집 사장이 사과한다. “오늘 응대가 느리고 엉망이었죠. 정말 죄송합니다.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안 나왔어요.” 저번에도 사장은 그렇게 변명했지만 이제 배가 불러 그런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돼지들은 너그러운 웃음을 짓는다. “어휴,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잘 먹었습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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