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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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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담
조상현 <한국음협이사장>
이강숙 <서울대음대교수>
조=70년대에는 사회 경제발전에뿐아니라 문화에도 눈을돌려 무언가 새롭고 보람있는 작업을 좀 해보자고 생각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문예진흥원이 설립(73년)되었고, 음악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음악제(76년)가 생겼고, 대한민국 작곡상(77년)도 제정되었지요.
예술의 전당을「모토」로한 세종문화회관도 건립 되었읍니다(78년). 나름대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지난10년간 한국 음악계는 꾸준한 성장을 해왔다고 볼수있겠지요.
이=한국음악, 나아가서는 민족음악에 일반이 관심을 돌리는데 어느정도 가능성을 보였던 시기였지요. 한 나라의 음악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음악인과 정치나 행정등을 맡은 비음악인과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때 명목상이나마 그 가능성도 보였습니다.
조=우선 창작계를 살펴보면 창악회·미래악회·한국현대음악협회·「아시아」작곡가 연맹등「그룹」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지난10여년간 신인작곡가의 발표무대가 되었던 서울음악제가 정부의 지원중지로 올해에 중단위기에 처했읍니다만….
이=숫자상으로는 신작이 많이 발표되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 작곡발표회가「프로그램」을 만들기위한 행사같이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작곡가 스스로가 발표만하면 작품은 남는다는 생각에서 떠나 자신의 작품을 양심적으로 분석하고 책임을 지는 풍토가 절실해요.
조=미래를 내다보고 작품을써서 대중을 이끌어가는 작곡가의 사명이 자각되어야겠지요.
이=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창작경향은 크게 2종류로 나누어 생각할수있는데 그하나는 서양의 과거 18세기의 음악기법인 전통기법에 집착하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하나는 현재 20세기 작곡기법으로 작곡하는 경우입니다.
과거지향파들의 상투화된 음제도속에서 찾아지는 음악적 정보가 많을수없고, 어렵게만 써놓으면 일반이 모른다느 sdldb로 무한한 정보가 포함되리라는것도 문제지요. 그들사이의 다리역할을하는 작품창작이 요구된 시기였어요.
조=70년대는 또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음악가, 그밖에 국내외 중견 및 신인들의 음악회가 상당히「러시」를 이룬 시기였어요. 세계적인 연주솜씨를 자랑하는 한국출신 연주가들도 여럿 배출되었습니다.
이=김영욱·정경화씨같은 경우는 과장하지 않고도 가히 그 연주솜씨가 세계적이라할수 있어요.
한국인의 음악적인 재질은 불가사의한 것이지만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조=78년 세조운화회관이 개관된것도 7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음악계의「이슈」라고 할수있겠습니다. 그뿐아니라 약12주에 걸친 한국역사상 최대의 개관기념 예술제는 비교적 폭넓은 해외의 일급 교향악단과 연주가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지요. 이 예술제가 한국음악계에 준 영향도 적지않았습니다.
이=우리나라 연주가들에관한 이야기를 좀 하지요. 많은 연주회가 열리고 있지만 한국연주가들은 대부분 주어진 음악을 잘 연주하겠다는 생각만을 할뿐이고 적극적으로 어떠한 음악을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사실 70년대에 들어와 우리가곡이 많이 불려지고 또 인기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과연 그 노래들이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우리 가곡이냐는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계면조·평조하는 식의 한국인의선율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 서양가곡도 아니지요.
조=「서머·뮤직·캠프」등이 새로 생겨 인기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고 또 음악의 천재교육에대한 관심도 높았던 것 같은데 부작용도 많았지요?
이=음악교육에 문제가 많아요. 인간의 음악적 감수성이 경험에 의해 확대된다는 이론을 음악교육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교육을 받는까닭에 그들의 능력은 한정되고 치우칩니다.
조=서울시향이 동남아순회연주를 하고 국립교향악단이 미국순회연주를 하여 해외로 안목을 넓힌것도 70년대입니다.
이렇게 음악인들이 활동무대를 해외로 넓히고 경험도 쌓는 것은 보다 풍부한 연주를 위해 필요하겠지요.
이=그런데 이같은 모든 활동이 정말 경험을 넓히고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치밀하게 연구되어 실행되고 사후에도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것같아요. 따라서 해외순회연주나「뮤직·캠프」, 그사실 자체만으로는 큰의의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조=70년대에 가장 많은 활동을한 성악가로는 오현명·이규도·박성원씨를 꼽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피아니스트」백낙호씨도 꾸준히 활동을 했습니다.
이=작곡가로는 백병동·강석희씨 성악가 김성길씨도 활동을 많이했습니다.
조=앞으로 올 80년대를위한 몇가지 음악정책에 관한 건의사항을 이런 기회에 얘기하고 싶어요. 우선 음악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면 합니다.
한국에는 과학도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는 많지만 음악도를 공부시키고 해외에 유학보내는 장학금은 없습니다.
한국의음악이 세계적인 음악으로 되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는 80년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한국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지요.
한국인의 음악어법으로 쓰여진 한국적인 창작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리라는 것입니다. 각기 그나라에서 국민음악파라고 불리던「러시아」의「무소르그스키」,「헝가리」의「바르토크」가 자신의 나라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음악으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것처럼….

<정리=박금옥기자>

<음악일지>
▲정명훈씨「차이코프스키·콩쿠르」입상=74년7월. 소련「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회「차이코프스키·콩쿠르」「피아노」부문에서 정명훈씨 2위입상.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제1회 대한민국 음악제=76년9월8~20일. 해외에서 활약하고있는 젊은 한국인연주가와 외국 일급연주가를 초청, 한국연주가와 음악회를 갖도록 정부가 주관한 연례음악제(국립극장). 이 음악제를통해 이성숙(소프라노)·신경욱(「오페라」연출)·김창국(플룻)·정찬우(바이얼린)씨등이 한국청중들에게 소개되었다.
▲서울시향 동남아 순회연주회=77년5월925일. 창단 20주년을 맞아 지휘자 정재동씨가 이끄는 97명단원이 대북·향항·「방콕」·「쿠알라룸푸르」·「싱가포르」등 동남아 5개국을 돌면서 20여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안익태씨 유해 국립묘지 안장=65년9월「스페인」에서 작고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씨의 유해가 77년7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세계 청소년 음악제=77년8월. 한국 청소년음악연맹(이사장 임원식)과 한국 국제문화협회 주최로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세계적인 지휘자「프랑스」의「세르지·보도」등 50개국의 음악가 및 음악도 5백여명이 참가.
▲「피아니스트」백건우부부 납치 미수사건=77년 7월「프랑스」에 거주하는 백건우씨와 부인 윤정희씨(영화배우)등 일가족 3명이「유고슬라비아」에 유인되었다 하룻만에 주「유고」미국영사관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
▲지휘자 금난새씨「카라얀·콩쿠르」입상=79년10월. 독일에 유학중이던 금난새씨(32)가「베를린」에서 열린 제5회「카라얀·콩쿠르」에서 입상.
▲제1회 대한민국 작곡상=77년12월. 창작음악의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77년12월 정부가 제정. 제1회때는 대통령상 수상작을 내지못했다.
2회인 78년에는 대통령상수상자로 국악부문의 이상규씨(35.국립국악원연주원)가 뽑혔다.
▲박영희씨 작곡「콩쿠르」입상=78년1얼. 서독에 유학중인 박영희씨가 권위있는「스위스」의「모스빌」작곡「콩쿠르」에 입상.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예술제=78년4월21일~7월8일. 총공사비 2백2억원을 들여 대극장(4천2백석)소극장(5백석)과 거대한「파이프·오르간」을 갖춘 세계적인 규모의 공연장이 완공.
약12주에 걸쳐 연인원 만여명이 출연한 1백42회의 공연으로 한국역사상 최대의 개관기념예술제를 가졌다. 거장「유진·오먼디」가 지휘하는「필라델피아·오키스트러」,「라인스도르프」가 쥐휘하는「뉴욕·필」등 세계적인「오키스트러」가 연주회를 가졌다.
▲「서머·뮤직·캠프」시작=주한 독일문화원주최로 독일 및 미국의 일급 음악교수를 10여명 초청 이화여대에서「피아노」·성악·관악·「바이얼린」·「첼로」등에 걸쳐 본격적인「뮤직·캠프」를 가졌다. 연례행사로 계속되고 있다.
▲국립교황악단 미국순회 연주회=79년 1월11일~2월28일. 창단 23년만의 첫해외나들이로 지휘자 홍연택씨등 총1백2명의 단원이 50여일간 미국전역을 누비면서 총50여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예능교수 개인「레슨」엄단발표=79년 2월.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대학예능교수들의 개인「레슨」이 문제되자 박찬현문교부장관이 개인「레슨」엄단조처를 발표,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결국 80학년도 대학입시를 위한 예능실기는 국가가 관리키로 되었다.
▲전봉초교수 필와사건=79년3월. 음악세계 4월호『예능교수 개인「레슨」엄단에붙여』란 제목의 특집중『음악은 조기교육이 필요하다』는 글을 통해 학부모·평론가·기자를 함께 싸잡아 비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주요 무형문화재 상설극장 개설=79년9월. 국립국악원이 주최하여 전통무형문화재중 국악과 무용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가 출연하는 상설무대를 마련, 대악회(회장 김천흥)주관으로 매달 회씩 수요일(하오4시)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다.
▲제6차「아시아」작곡가 대회=79년10월.「아시아」작곡가연맹 한국지부(회장 이성재)의 주최로 세계15개국 1백53명의 음악가가 모여「호텔신라」등에서 회의 및 연주회를 가졌다.
▲70년대작고 음악인들=「소프라노」이관옥씨(76년), 국악인 박헌봉 신쾌동씨「이상77년」, 역시「소프라노」였던 정훈모씨「78년」, 지휘자이자「바이얼리니스트」였던 안병소씨(79년)가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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