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피워도 묵인' '위자료 무조건 포기' … 헌법·민법 위배된 약정은 무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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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울산에서 미용사로 일했던 A씨(37·여)는 2001년 미용실 사장이었던 B씨(39)와 결혼하면서 혼전계약을 맺었다. 재혼인 B씨가 결혼 조건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이혼할 경우 위자료와 재산분할 청구권을 모두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의 외도로 다툼이 잦아졌고 A씨는 2006년 이혼소송을 냈다. B씨는 5년 전 작성해 둔 혼전계약서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면서 “위자료 및 재산분할금을 모두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울산지법 가사단독은 2007년 10월 “B씨는 A씨에게 위자료 1500만원을 주고 재산분할금으로 98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부부는 자유롭게 재산에 관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혼인의 본질이나 부부 평등, 사회 질서에 반하는 내용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혼인 전 장차 이혼할 경우를 대비해 체결한 재산분할청구권 포기 계약은 부부 평등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공서양속(公序良俗·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봤기 때문이다. 혼전계약을 맺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법원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계약서든 작성만 해 놓으면 다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법률로 규정된 부분을 어겨서는 안 된다. 예컨대 ‘한쪽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도 이혼소송을 낼 수 없다’는 계약 내용은 인정받기 어렵다. 민법 840조에 재판상 이혼 원인으로 ‘배우자가 부정한 행위를 할 때’라는 규정이 명백히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재판상 이혼 원인인 ‘배우자를 유기할 때’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등에 대한 계약도 마찬가지다.

 부부 평등의 원칙은 헌법상 기본 원칙이다. 이를 어기는 약정도 무효다. 이를 테면 부부 중 한쪽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경제적 행위를 할 때 전부 배우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약정 등을 말한다. 이혼 이후 부양료를 포기하게 한다든지, 자녀양육을 한쪽에만 맡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최재혁(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간혹 터무니 없는 내용을 계약서에 넣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 봤자 해당 약정은 무효라고 설득해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설명했다.

 계약 내용에 반드시 재산과 관련한 내용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기타 사항으로 자녀 교육 및 양육 방법, 종교 등에 관한 두 사람만의 약속을 포함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상대방의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등 공서양속에 반하는 내용은 인정받기 힘들다.

 계약 체결 과정이 공정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자유로운 의사가 아니라 한쪽이 특별히 불리한 상태에서 충분한 협상 기간 없이 계약을 했다면 인정받기 힘들다. 김현진(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협상을 위해 충분한 기간이 부여돼야 하고 한쪽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다면 상대방도 독립된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등 공정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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