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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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상에 장례의 식만큼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행사도 없을 것이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가문마다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그것은 변해 왔다.
멀지 않은 조선시대만해도 국장쯤 되면 그 의식절차가 책으로 한권이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우선 신우지지에 따라 산능을 정하는 일부터 복잡하고 미묘했다. 때로는 지관들이 저마다 산의 호부호를 놓고 시비를 벌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명칭조차 외기가 번거로운 의식들이 줄줄이이어졌다.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역시 논란이 분분하기 마련이다. 이런 시비로 하여 정론이 갈리고 파당이 생겨 정쟁으로까지 번지는 일도 없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는 비록 일제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일반서민들도 흰갓을 쓰고 조의를 표했었다. 그러나 이런 백립은 순종때는 거의 없어지고 새로운 변례가 나오기도 했다.
아뭏든 옛날의 국상은 그것이 임금이나 왕비·왕세자·세자빈·왕세손·왕세손빈의 장비인만큼 봉건적인 의식의 극치를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선왕조시대엔 유교의 의식에 집착해서, 그 절차는 더욱 복잡하고 번거롭고 어지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근년 멀리 외국의 경우는 「드골」이나 「처칠」이나 「케네디」의 국장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나 영국은 왕조시대를 겪었고, 또 영국은 아직도 왕국이긴하지만 그 의식들온 한결 간결했던 것 같다.
물론 정중과 엄선의 예는 다했지만 번거로움도 과장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케네디」 대통령때는 그의 서거자체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경건과 정중」일색의 의식만이 있었다.
「라디오」와 「텔리비전」은 자율적인 협의에 의해 그날 하루 정규방송을 밀어놓고 장중 「무드」의 「프로」룰 편성했었다.
모든 경우의 장비식에는 깰 수 없는 「룰」이 하나 있다. 「정중」·「경건」·「엄숙」이 그것이다. 죽음은 어느 경우나 이런 경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승에 얼마나 큰 자리를 남겼느냐에 따라 그 도와 의식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도 민주사회에선 점차 「간소」와 「절도」를 찾게 되었다. 형식보다는 마음, 곧 심정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의식에 감동되어 눈물올 흘리고 애통해 하기보다는 각자의 마음 속에 느껴지는 감정에 따라 그러는 것이다.
건국후 국장을 처음 맞는 우리로는 의식이나 절차로서 보다는 경건과 엄숙으로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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