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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7·30 '장기판' 공천 … 이게 민주주의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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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외과

지난주 스웨덴 스톡홀름대 한국학과 가브리엘 욘슨 교수가 내뱉은 말이 뜨끔했다. 한국에는 왜 이렇게 재·보궐선거가 많으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국회의원들이 광역단체장선거에 출마하느라 보궐선거가 많아졌고, 2012년 총선에서 선거부정을 저질러 당선무효형이 확정된 이들이 많아 재선거도 증가했다고 답했다. 10년 지기인 욘슨 교수는 지방선거에 나올 사람이 왜 국회의원이 되었느냐고 꼬집었다. 스웨덴에서는 선거부정이 없어 평생 재선거가 한 번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재·보궐 선거가 실시되는 사유들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을 뿌리째 흔들고 다른 선거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할 때 창피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선거구마다 선거 관리비용으로 약 10억원이 소요되니 15개 선거구에서 어마어마한 세금이 헛되이 사라지게 된다. 경제위기 속에서 정치권이 앞장서서 혈세를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의(大義)도 없고 대의(代議)도 아니다. 아직까지 양대 정당은 이런 선거를 많이 초래한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도 안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간 단골 메뉴였던 한국 정치와 정당의 개혁이나 혁신을 말하지도 않는다. 새누리당에서는 혁신위라는 걸 선보였지만 구색을 맞추는 데에도 못 미치고 있다. 야당도 입에 달고 살던 ‘새정치’를 얘기하지 않는다. 7·30 재·보선에서 여야는 서로 경쟁적으로 대의를 저버린 셈이다.

 대의 민주주의란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분화하면서 더 이상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지자 고안된 제도다. 유권자가 정해진 기간 동안 대표(의원이나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대신 통치하게 하는 정치제도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유권자를 대리하고 대표하는 선거구다. 여기에서 선거구는 지리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고 계급이나 계층 또는 직업 등 사회적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7·30 선거에서는 이런 대의 민주주의 원칙이 사라졌다. 양대 정당은 마치 장기판에서 말을 쉽게 옮기듯 아무 지역적인 연고나 대표성도 없는 곳으로 후보들을 이리 저리 옮기고 있다. 원칙도 질서도 없는 편의주의적 공천이다.

 여당은 이명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친이계 임태희 전 의원을 지역연고가 없다고 평택에서 배제했다가 다음날에는 지역연고가 더 없는 수원 영통에 공천했다. 야당은 광주 광산을에 출마하겠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기동민 전 정무부시장을 서울 동작을에 전격적으로 공천했다. 동작을에서 출마를 준비해온 허동준 지역위원장은 원칙 없는 김한길 표 전략공천의 희생양이 되었다. 김한길 표 전략공천은 요새 말로 ‘의리’도 없고 오히려 20년 동지 사이의 의리를 갈라놓는 것이다. 서울 동작을로 이사까지 하고 출마선언을 했던 금태섭 전 대변인은 안철수 표 새정치의 오발탄에 불과했다. 이제 또 금태섭을 어디로 돌려 막을 것인가.

 7·30 선거에서 양대 정당이 원칙 없는 하향식 전략공천을 남발하는 것은 그간 조금씩 쌓아 왔던 정당 민주화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다. 그간 정당 민주화의 핵심은 공천권을 소수 지도부의 독단적인 결정으로부터 공천심사위원회에게 넘겨주거나 국민참여경선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여야의 공천은 공천관리위원회가 아니라 소수의 당 지도부의 손아귀에 있다. 2014년 정당 민주주의가 수십 년 전으로 후퇴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당은 비슷한 이념과 정강정책을 공유하고 선거에서 정권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조직이다. 그래서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궁극의 목표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공약과 정책으로 유권자의 표를 얻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단지 선거에서 이기려고 맞춤형 전략공천이라는 사술(詐術)을 펼 경우에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공천파동 때문에 유권자들은 정당을 더 혐오하게 되고 정치를 더 불신하게 되며 선거에 대한 관심을 줄이게 된다.

 미국에서는 당원들의 경선을 거쳐야 정당후보로 선출된다. 장기간 지역주민과 교류하고 신뢰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영국에서도 선거를 앞두고 다른 지역에서 낙하산으로 날아온 후보가 박힌 돌을 빼낼 경우 지역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여론조사를 통해 정당의 공천을 결정하는 건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후진적인 형태다.

 이러한 사이비 민주주의 공천은 이번 선거에서 낮은 투표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역대로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20~30%대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13년 4월 재·보선부터 사전투표제가 채택된 덕분에 투표율이 다소 상승했는데 다시 변수를 맞았다. 7·30 선거는 국회의원 정수의 5%를 충원하는 중요한 것인데 볼썽사나운 공천파동에다 삼복더위 휴가철이라는 점 때문에 투표율이 낮을까 염려된다. 투표율이 아주 낮아지면 최악의 경우 수천 표로 당선되는 국회의원이 생길 수도 있다. 여야의 후진 정치가 대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