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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방한, 빈약한 성과 … 한·중 관계, 현상유지 불가피

중앙일보

입력

이번 서울 한·중 정상회담은 형식의 화려함에 비하면 알맹이는 그저 그런 평범한 것이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서울 중시’ 모양새 방한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으나 성과는 조촐했다는 평이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는 지적도 있다.

시 주석의 서울 나들이는 여러모로 주목의 대상이 됐다. 지난해 3월 국가주석에 오른 시진핑은 혈맹 관계인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애써 외면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과 시 주석의 평양 방문 논의는 미동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북과 대치하는 남한의 수도에 먼저 발을 디딘 것이다. 그것도 다른 나라와 함께 방문하는 순방 형식이 아닌 한국 단독 방문이어서 중국 외교 관례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 행보였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방한치고는 성과가 미미했다는 평가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안보나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평소 기대한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며 “한·중이 서로 경제협력 내실화를 증진하고, 각각의 외교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간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였다”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 일본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을 막고 견인하려는 의도가 있는 반면 한국은 중국을 북한으로부터 완전히 떼어 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걸 만족할 만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던 구조적 한계 상황이 분명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결국 한·중 관계가 한·미 동맹 수준에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히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말의 성찬은 충분하다”며 “이제는 양자 관계에 있어서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가 나와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북핵 반대’ 표현 공동성명에 반영 안 돼
북한 핵실험에 대한 명백한 반대 문구가 공동성명에 반영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중국이 북한에 자극을 주지 않고 여전히 후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려 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미국과 일본을 다분히 의식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하지 않았다. 위안부나 과거사 문제도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공동성명에 거론하지 않았다. 시 주석이 요구한 내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과 광복절 70주년 공동기념행사 개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일본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이다.

회담 둘째 날인 4일 보여 줬던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자위권 확대, 고노담화 재검증 등에 대한 한·중 정상의 공조 비판은 다소 의외였다. 시 주석 입장에선 아베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에는 부정적이면서도 정작 공식회담에서는 중국과 손잡는 모습을 보여 주기 꺼렸던 한국을 일정 부분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외대 중국연구소장 오승렬(중국학부) 교수는 공동성명이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표현한 점을 지적했다. 이는 우리가 요구했던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과는 다소 어감이 다른 것이다. 홍현익 연구위원도 “북핵이나 외교안보에서 획기적인 돌파구가 마련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정상회담 때는 공동성명에 ‘양측은 유관 핵무기 개발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비교하면 ‘확고한 반대’라는 문구가 들어간 올해 공동성명이 더 단호한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오승렬 교수는 “공동성명에 유명무실해진 6자회담 부분이 지나치게 할애됐다는 느낌이 든다”며 “중국의 요구가 많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동북아 정세 이완 기회” 긍정 평가도
긍정적인 요소도 없지 않았다. 한·중은 정상회담을 통해 자칫 냉전적 질서로 재편될 수 있는 동북아 정세를 상당히 이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경남대 김근식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양자 한·중 관계만 놓고 보면 서로 간의 유대를 강화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꺼져 가던 6자회담의 불씨도 절충적 수준에서 살려 놨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한국이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쪽으로 기운다는 인상을 심하게 주지 않은 데 대해 한편으로는 안도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미국으로서도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좀 더 설득시켜 한·일 관계를 개선하도록 적극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셈이다. 중국은 어찌 됐건 한국을 먼저 방문함으로써 북한을 충분히 압박했다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이 베이징에서 서울의 한·중에 맞불을 놓긴 했지만 양자 협력의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는 평가다. 홍 연구위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대북 제재 부분 해제는 유엔 안보리의 광범위한 제재는 지키면서 일본이 자의적으로 설정했던 걸 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국제정치·외교적 의미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의 제재 상황을 풀어주는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북·일 관계 재개의 외형이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진 센터장도 “북핵 문제가 걸려 있는 한 일본이 독자적인 대북 관계를 주도할 수 없는 국면”이라며 “북·일 관계 개선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미국이 북·일 접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오히려 중국에만 의존해 오던 북핵 압박수단을 일본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큰 틀 유지하며 외교적 줄타기 계속 전망
동북아 전체적으로 보면 합종연횡이 시도되고 있지만 어느 한쪽이 결정적으로 진영을 옮겨 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다만 이해관계에 따라 큰 틀에서의 미세조정은 가능한 형국이다.

한국은 미국을 등에 업고 북한과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으려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에 한 발짝 더 다가갈수록 한·미 동맹과 한·미·일 3각 협력구조에 균열을 일으킬 부담을 안고 있다. 외교적 줄타기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중국은 북한과는 멀어지는 것을 감내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시 주석이 적극 구애공세를 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은 이러한 구도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마뜩잖은 사이이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어색하게 손을 잡고 있는 구도다.

실제로 시 주석이 베이징으로 돌아간 이후 동북아에는 혹시나 예상했던 큰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한·미나 미·일, 북·중 동맹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의 큰 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미·중이 ‘피벗 투 아시아(아시아 중시정책)’와 신형대국 관계를 내세워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도도 여전하다. 한·미, 한·중, 중·일, 미·중 등 모든 양자 관계에 정답이 없는 상황이다. 단지 양 진영 간에 교류가 좀 더 증진되고 있는 정도가 작은 변화라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절대적인 우방도, 과거의 절대적인 적도 없어진 가운데 각자 실리만 챙겨 나가는 국면이 돼 버렸다.

“한·미 동맹, 반중 동맹 되지 않아야”
한국 입장에선 한·미 동맹의 신뢰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 연구위원은 “단지 한·미 동맹이 반중 동맹이 되지 않도록 미국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에 들어가거나 한·일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 연구위원은 “한국이 MD에 가입하거나 하면 중국이 경제적 측면에서 엄청난 압박을 가해 올 것”이라며 “그러면 우리가 버텨내기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남북 관계를 개선하거나 적어도 최악의 관계로 몰리지 않도록 유지한다면 우리의 운신의 폭은 넓어질 수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북한과 유화 국면을 조성한다면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 김근식 교수는 “우리 카드는 남북 관계 개선인데 이걸 손 놓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홍 연구위원은 “우리가 계속 끌려다닌다면 북한에 퍼주기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대가를 주변 강대국들에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너무 한·미 동맹에만 집착하지 말고 동북아 평화와 공동번영을 강력히 주장하는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진창수 센터장은 “북한이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우리가 전향적으로 도울 건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겠다든지, 최근의 상호 비방 중단 특별제안을 내놓는다든지 하는 작은 화해 제스처를 너무 박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며 “기회가 되면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인천 아시안게임, 교황 방한 등을 앞두고 북한이 남북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을 다시 다자체제로 끌어들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박영준 국방대 외교안보대학원 교수는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개최 등의 제의를 해볼 만했었다”고 말했다.

한경환, 박신홍 기자 helmu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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