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정이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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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오 슬프도다. 한스럽도다.
산하는 변하여도 나만은 천준를 다하리라고 여겼다면 내가 도시 노망한 탓이었을까.
초노를 넘기지도 못하고 이제 몸져 눕다니 이 무슨 망신스런일인가.
하기야 남부럽잖을만큼 형화도 누렸겠다, 앞으로 더산다고한들 별 수야 없겠거늘….
올려다보며 살지는 말랐다지만 세상에는 거웅들도 많다오.
「캘리포니아」주의「시쿼이어」숲에 있는 높이 1백m가 넘는「레드우드」, 「멕시코」 의 「오아하카」에 있는 직경이 13m나 되는「탁소디움」이란 거목, 또는 수령이 5천년이나된다는 「캘리포니아」동부에 있는 노송…, 이런 거수의 무리속에 끼면 수령이 고작 5백80년에 높이 21m에 불과한 나야 애송이 중의 애숭이에 불과하다오.
하나 나만큼 벼슬높은 나무는 온세상에 또 어디 있겠소.
그게 세상때였다오. 임금이 행차할때 가마에 걸릴뻔하던 가지가 살짝 올라갔다는 공으로하여 받은 벼슬.
정이품이라면 시젯말로 장관급.
그걸 내세우는건 아니오만 범속의 무리가 감히 얼씬거릴 수도 없던 귀한 이 몸이었다오.
그후 몇백성상을 거듭하는 가운데 나보기에도 탐스러울만큼 복령도 여기저기 자리잡혀 귀티를 더해가고….『선경』에도 복령의 크기가 주먹만하면 온갖 귀신을 물리칠수 있다 하잖았소.
그 덕인지 모르오나 벼락이며 모진서리에도 까딱없었고 철없는 뭇사람들의 칼장난이며 송충이며 좀도 견디어 왔다오.
지난 62년 겨울인가는 천연기념물103호로 지정되어 초노에 또한번 호강할수 있으려니 했으나….
하나 이 무슨 조화론지 몇해전 부터는 근력을 잃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지난76년엔 나부 밑부분 세곳에 개복수술을 받아야했으니.
하나 이미 내 정기는 다 가셔진 모양이오. 이제 또 지난번수술로 아물잖은 부분을 다달이 영양주사를 놓아주겠다지만 그러나 골병든 노인에게 「비타민」이나 「링게르」주사액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제발 그놈의 자동차연기 만이라도 덜 마시게 되면 그래도 몇해는 더 살 수 있을 것만 같다오.
하기야 바둥댄다고 죽음을 묶어둘수는 없는 일이오. 또 노추를 드러낼바에야 차라리 속 시원히 숨을 끊는게 낫겠거늘.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고, 공연히 정이품을 받고, 그게 이제사 뭣보다도 원망스러울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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